즐거움 삼합

발행일 2021-12-05 16:17:1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정명희 정명희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얼굴에 닿는 바람이 차갑다. 패딩 차림의 모습들이 거리를 장식한다. 울긋불긋 곱던 단풍은 어느새 잎을 다 내려버리고 앙상한 골격으로만 남아 알록달록한 장식 등을 매달고서 겨울나기에 든 것 같다.

입동이 지나면 김장철이 된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바야흐로 김장할 때가 됐다.

오늘은 김장하기로 정한 날이다. 팔공산이 보이는 텃밭에서 키운 배추와 무를 지난 주말에 뽑아서 갈무리해 둔 집으로 향한다. 남자 셋 여자 둘, 집안 식구들이 역할을 분담했다. 소금으로 절이는 담당, 힘 좋은 이는 깨끗이 씻는 담당, 손맛 좋다고 소문난 이는 양념을 담당했다. 팔뚝에 힘이 있는 이는 무채를 썰고 가만히 앉아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는 갓을 다듬고 실파 뿌리를 골라서 씻었다. 배춧속에 들어갈 김치 양념을 만들기 위해 찹쌀을 밥과 죽 중간쯤 되는 묽은 밥처럼 해서 고추 양념에 부어 비비고 나서 마늘, 젓갈, 생새우, 굴과 홍시, 멸치 가루, 배와 기타 야채류를 넣고 혼합시킨다. 걸쭉한 반죽이라 팔의 근육 강화 훈련이 필요한 때다. 평소에 맛이 있다고 여겼던 양념들을 모두 골라 넣어 육수에 섞었다. 휘휘 저어 빛깔 좋은 양념을 만들어 즐거움을 버무려보기로 한다.

인근 카페에서 얻어 온 커피 찌꺼기로 두둑하게 거름을 준 검은 빛의 텃밭에 햇살 좋은 날 배추 모종을 심었다. 직장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거리에서 씨앗을 파는 할머니에게서 무씨를 한 봉지 사서 가득 뿌렸다. 주말이 돼 시간이 날 때마다 갈증을 달래주는 물을 뿌리고 김을 매주며 자식처럼 가꾼 배추와 무, 무럭무럭 자라나서 텃밭을 지나는 이들에게도 부러운 눈빛을 가득 받았다. 날이 가고 달이 가니 배추는 속이 알맞게 차오르고 무는 종아리처럼 굵어져 갔다. “김장, 언제 하는가요? 제발 좀 뽑아서 갈무리해주세요. 이슬이 내리니 너무 추워요” 와삭와삭 소리를 내는 배춧잎의 외침이 들리는 듯해 날을 잡았다. 두 주일에 걸쳐서 가을걷이하고 이틀에 걸쳐 김장하기로 마음먹었다. 배추를 깨끗이 다듬고 밑동을 도려낸다. 무는 무청을 잘라서 베란다 줄에 옆으로 죽 걸어두고 시래기로 말라가는 것을 기대해 보리라. 소금과 물, 황금비율로 섞어서 휘휘 저어 간을 맞추고 배추를 담갔다가 꺼내어 커다란 함지박에 넣고 알맞게 절이기로 한다. 하룻밤이 지나고 간이 밴 배춧잎을 맛보니 간간하게 익었다. 이제는 깨끗이 씻어서 물을 빼야 한다.

충분히 물이 빠지고, 커다란 테이블을 펴서 쪼그리고 앉는 대신에 서서 양념을 버무리기로 결정. 남자들의 힘을 빌려서 상을 차리고 쭉 둘러서서 김치 섞기가 시작됐다. 여럿이서 커다란 김치 매트 위에다 배추를 놓고 양념을 버무리기 시작한다. 빨간 양념이 하얀 배추의 속으로 속속 밀어 넣는다. 바깥의 잎사귀를 끈처럼 둘러서 동여매어 알맞은 크기로 만들었다. 맛나게 익기를 바라며 모두가 정성을 다한다. 배추가 자라면서 우리에게 준 기쁨과 무가 굵어지면서 보여준 즐거움을 다시 새겨본다. 이들은 분명 맛으로 우리에게 보답할 것이란 확신을 하면서 자꾸만 팔뚝이 굵어지는 듯한 느낌을 참아가며 다들 저마다 김장하기에 몰두한다.

매번 김장 때가 되면 너무 힘이 들어서 올해를 마지막으로 다음번에는 아예 사 먹어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입동이 지나고 김장철이 다가오면 또다시 김치만은 내 손으로 해서 아이들에게 식구들에게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곤 한다. 게다가 날마다 무럭무럭 커가는 배추와 너풀너풀 싱싱한 잎을 달고 쑥쑥 자라 올라오는 무를 보면 그런 마음은 싹 가시고 모종을 심고 씨를 뿌려 텃밭을 가꾸게 된다. 봄이 되고 언 땅이 녹으면 또다시 팔을 걷어붙이고 밭일을 시작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김치는 그야말로 슈퍼 푸드다. 각종 무기질과 비타민이 풍부하다. 김치 1g에 1억~10억 마리의 유익균이 존재해 면역력을 증진하고 항염증 효과가 있어 콜레스테롤과 동맥경화 예방에도 좋고 항산화와 항암효과도 있다. 김치 재료 하나하나(11)가 모여 22가지의 효능을 낸다는 의미로 11월22일은 ‘김치의 날’이기도 하다.

김장의 맛은 힘든 일을 끝내고 나서 먹는 수육과 굴과 겉절이지 않을까. 김치에 싱싱한 굴을 얹어 한입에 넣으니 세상의 모든 힘든 것들이 다 사라진다. 바로 이런 즐거운 시간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수육, 맥주를 넣어 흑돼지 목살을 오래오래 푹 구운 수육, 도마 위에 놓고 활처럼 휜 칼로 쓱쓱 잘라서 먹는 수육이 침샘을 자극한다. 신선한 굴, 갓 묻힌 겉절이, 김이 무럭무럭 나는 수육이야말로 김장을 끝내고 하는 최고의 만찬, 김치 삼합, 바로 즐거움 삼합이지 않으랴.

정명희 정명희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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