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욱 에녹 원장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을 통한 한류의 물결은 ‘오징어 게임’에서 ‘지옥’이라는 드라마로 이어지고 있다. 비평가들의 입을 통한 한류 드라마의 매력과 세계화의 이유는 다양하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종합예술로 일컬어지는 영화나 드라마 부분의 쾌거란 점에서 한국문화의 자긍심을 느끼게 한다. 20세기 이후 할리우드(Hollywood)로 대표되는 미국 영화산업의 중심부에 한국영화를 알려온 영화인들의 땀과 노력의 결실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중국과 동남아로부터 시작된 한류의 물결이 BTS를 비롯한 음악, 영화 그리고 드라마의 세계적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이후 문화 콘텐츠산업의 기대치를 높이고 있다. 힘겨운 코로나 시국에 터져 나오는 작은 희망이 아닐 수 없다.

2014년 무렵으로 기억된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헬(hell) 조선’이라는 인터넷 신조어가 폭발적으로 유행한 적 있었다. 언론사에 따르면 당시 신조 유행어 1위인 ‘금수저’ 다음으로 2위를 차지한 단어가 바로 ‘헬조선’이었다. 둘 다 한국의 현실을 비판하는 말로서 젊은 세대의 절망감을 대변하고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임에도 지옥처럼 희망이 없는 곳으로 빗대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끊임없이 경쟁하고 비교하는 삶 속에서 그들에게 공정과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6년 최순실 특검법을 통해 밝혀진 딸 정유라의 특혜는 젊은이들의 절망감이 분노로 번지는 도화선이 됐다. 추위와 싸우며 촛불을 들었던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터져 나온 대통령 탄핵이라는 목소리가 그것이었다.

5여 년의 시간이 흘러온 한국에는 또다시 ‘지옥’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지옥행’을 예고 받은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저승사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초자연적 현상이 어느새 신의 계시로 받아들여지고 ‘새진리회’라는 신흥종교는 한국의 요소요소를 장악하고자 한다. 혼돈과 불안이 야기된 사회에는 어김없이 선동과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부정이 자리한다. 인간이 만든 제도와 시스템의 불합리함은 광신도인 ‘화살촉’ 단체에 의한 폭력과 살인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죄 없음에 대한 억울함은 존재할 수 없다. 집단이 만든 광풍 속에 지옥행을 예고 받은 사실만으로도 사회악이자 부끄러운 죄책으로 낙인찍힌다.

필자는 ‘지옥’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코로나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한때 중국 우한발 바이러스라 불렀지만 명쾌하게 증명된 근거 자료는 없다. 변이를 통한 자연적 현상일 수도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인위적인 바이러스란 말은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중국을 비롯한 동양인들은 애꿎은 공격의 대상이 돼야 했다. 신천지라는 신앙단체와 정통 교회들의 집회는 바이러스 확산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무자비한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됐다. 정부의 방역정책에 대한 비난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부 정책의 미흡함과 행정명령을 통한 강제성을 마냥 옹호할 수만은 없다지만 우리는 지옥행을 예고 받은 희생양을 찾듯 비난의 대상을 쫓고 있었다.

위드 코로나 발표 후 확진자 수는 7천명대를 넘어서고 있다. 2년 전, 대구 코로나로 불리던 상황보다 더더욱 심각한 상태임은 분명하다. 인과관계가 밝혀지지 않은 사망자 수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백신 및 예방접종이 80%를 넘어선 현재지만 확진자 수와 변이 바이러스인 ‘오미크론’의 확산세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이런 상황을 진퇴양난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소상공인을 비롯한 자영업자의 아우성에 정부는 위드 코로나를 발표했고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정치적 꼼수라며 비난하던 코로나 정국이었기에 여야를 비롯한 누구도 지금의 결과 앞에 자유로울 수는 없다.

흔히 우리는 결과에 대한 책임 소재로 나 아닌 타인을 지목하려 한다. 그것은 자신을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유로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진리’나 ‘정의’라는 말이 붙는 순간 그 자유로움은 집단 이성으로 탈바꿈돼 희생양을 찾아 나선다. 사회 구성원으로 공동의 문제 해결에 참여하려는 진정한 ‘공동체 의식’은 사라지고 없다. 예고 없는 저승사자가 자신만은 피해가리라는 요행수만 바라고 있다.

하지만 ‘지옥’ 속 한국의 모습은 희망을 전달하고 있다. 신생아에게 내려진 지옥행 예고 앞에 절망이 아닌 희망을 노래한 것은 ‘사랑’이었다. 죄 없는 아기를 저승사자로부터 지켜낸 부모와 초자연적 현상임을 자각한 이웃들의 공동체 의식이었다. 헬조선이 아닌 정의와 공정의 ‘희망 한국’을 자신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김시욱 에녹 원장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