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유림의 아픈 손가락, 현대사회 선비로 부활하다

발행일 2022-11-27 15:39:53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영주 이산서원

퇴계 이황의 학문을 집대성한 ‘성학십도’의 판각을 보관했던 곳으로 유명한 이산서원은 퇴계의 뜻을 기리는 서원으로 1573년 창건됐다. 서원 철폐령 이후 1936년 경지당과 지도문만 복원됐으나 2008년 영주댐 건설로 수몰될 상황에 처하자, 현재의 이산면 석포리로 옮겨 모두 복원됐다. 김진홍 기자
영주는 흔히 ‘선비의 고장’으로 불린다. 조선시대 기본 사상이자 사회 윤리로 자리 잡은 성리학의 연구가 가장 활발히 일어났던 곳으로, 우리나라 최초 서원으로 알려진 소수서원의 존재 역시 그 명성에 한몫을 했을 것이다.

선비는 조선시대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사회적 지배계층을 뜻하는 양반과는 궤를 달리한다.

지금도 영주 사람들은 양반이 아닌 선비의 고장으로 불리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선비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인 서원은 최근 소수서원을 위시한 9개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될 만큼 현대사회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최고의 위상과 업적에도 소수서원의 명성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한 영주 유림들의 아픈 손가락이 있다. 바로 이산서원이다.

퇴계 이황 선생은 서원 원생들이 지켜야 할 행동 지침과 공부 방법, 학문 목표 등을 담은 원규를 만들었다. 우리나라 서원 원규의 효시이자 운영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서원의 경지당(중앙),진수대(왼쪽),성정재(오른쪽)
◆퇴계가 곧 이산의 역사다

서원의 주된 기능은 제사와 강학이다. 특히 어떤 인물의 위패를 봉안하느냐에 따라 서원의 위상이 달라지는데, 이산서원은 무려 조선의 대학자 퇴계 이황 선생을 제향하고 있으니 당시의 위상과 명성을 능히 가늠할 만하다.

이산서원은 1558년(명종 13) 건립된 서원으로 옛 영천군(현 영주시) 지역에서 처음 건립된 서원이다. 간혹 소수서원과 영주 최초 서원의 자리를 두고 갑론을박이 오가는데, 이는 옛 영천군과 현 영주시의 구획이 다른 데서 오는 오해인 듯하다.

옛 영천군 지역에는 16세기부터 ‘거접’으로 불리는 관청 후원 교육 기관이 존재했다. 1558년 당시 군수였던 안상이 이를 제도화하기 위해 지역 사람들과 함께 번현(현 영주시 휴천동 일원)에 32칸의 학사를 지었는데, 이것이 이산서원의 시작이다.

이때 안상은 유생 장수희를 이황에게 보내 학사의 명칭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기문을 부탁했다. 1559년(명종 14) 이황은 지명에 따라 ‘이산(伊山)’이라는 서원명과 함께 경지당·성정재·진수재·지도문·관물대 등 사당 및 강당의 모든 이름과 기문 및 원규를 지었다.

퇴계 이황 선생의 ‘이산서원기’에 따르면 이산이라는 서원명은 ‘본래의 지명에 의거했으나 조금 변경해 이산서원이라고 이름을 지웠다’고 기록돼 있다. 이산서원이 창건된 곳이 ‘산이리’였는데 ‘산이’를 ‘이산’으로 변경한 것을 말한다.

이황의 이산서원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는데, 서울에서 관직을 은퇴하고 도산으로 가던 마지막 귀향길에서 이산서원에 들러 강론하며 문도들과 담론을 펼쳤다는 기록도 전한다.

이황이 세상을 떠나고 2년 후인 1572년(선조 5) 사당을 지었으며, 이듬해 이황을 제향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서원의 모습을 갖췄다. 1574년 나라에서 여섯 번째 사액서원(첫째는 소수서원)이 됐으며, 1614년(광해 6) 임구(현 영주시 이산면 내림리)로 이건했다.

300여 년을 이어오던 이산서원의 세도 조선 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으로 이산서원이 훼철되니 치암 김석규가 상소문을 올리고, 노원 김철수가 유림들과 함께 통곡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산서원 관물대.
◆이산, 다시 일어서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이후 영주 유림들의 숙원은 단연 이산서원 복설(없앴던 것을 도로 설치함)이었다. 1936년 영주 유림이 힘을 모아 경지당과 지도문을 중창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지도문이 도괴되고 경지당도 붕괴되기 직전의 상태에 이르러 건물 보존 문제가 대두됐다. 이에 유림들은 경지당 및 부속 부동산 소유권을 영주시에 이전했다. 시는 정부지원금으로 경지당을 중수하고, 담장 및 주변을 정비했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뤄지던 이산서원의 완전 복원은 2008년 이산서원 복설추진위원회가 발족하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위원회는 이듬해 이산서원을 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영주시에 요청했으며, 2010년 경북도는 이산서원을 경북도 기념물 제166호로 지정한다.

이후 영주댐 건설로 이산서원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현 석포리 770번지로 이건하기로 하고, 경지당과 지도문 이건을 포함한 8개 동 모두를 이건‧복설하기로 결정했다. 2019년 부속동 등 8개 동의 이건·복설이 완료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태백산맥과 소맥산맥을 병풍으로 삼고 앞으로는 내성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명당에 자리 잡은 이산서원은 현대사회 인성교육의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퇴계 이황의 위패를 모신 사묘.


◆퇴계와 그의 문인들

퇴계 이황 선생을 빼놓고는 이산서원을 설명할 수 없다. 안동 도산서원과 함께 이황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는 유이한 서원으로, 원내에는 퇴계의 이야기가 켜켜이 묻어 있다.

천 원 지폐 속 인물로도 알려진 이황(1501~1670)은 설명이 필요 없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다. 1501년 경북도 예안(현 안동시)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했으며, 독서를 즐기는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이미 열두 살 때 ‘논어’를 익힐 정도로 학문 성취도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이황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서른네 살 때 과거에 합격했다. 이후 벼슬길에 나가 중종과 인종, 명종, 선조 등의 임금을 섬겼다. 그는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수많은 관리와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지면서 더 이상 나랏일을 볼 수 없다고 여겨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벼슬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된 선조에게 선현과 자신의 유학 사상을 한데 모은 ‘성학십도’를 바치기도 했다.

이황은 성리학(주자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서 ‘동방의 주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더욱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제자인 유성룡, 김성일, 정구 등은 주리론을 계승해 영남학파를 이뤘다. 주로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활약한 영남학파는 중부 지방의 기호학파와 경쟁하며 주리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가 출생지 안동과 함께 영주를 주 활동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아내가 영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풍기군수를 지내기도 했던 이황은 이산서원에서 수많은 영주의 명사를 길러냈다. 현 이산서원도 첫째 부인인 허씨의 묘가 잘 보이는 동산에 자리 잡고 있다.

이황과 함께 이산서원에 봉안된 박승임(1517~1586) 역시 이황의 제자 중 한 명이다.

1540년(중종 35) 병과에 급제, 여러 청환직을 지낸 뒤 사가독서(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줘 독서에 전념케 했던 조선시대 제도)했다. 이조좌랑 등을 거쳐 정언을 지내다가 소윤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영주에 돌아갔다. 1547년(명종 2) 예조정랑에 임명되고, 이후 현풍현감이 돼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데 힘썼다. 1557년 벼슬을 사직하고 학문에 힘썼다.

이후 풍기군수 등을 거쳐 진주목사에 이르렀다. 1569년(선조 2)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황해도 관찰사·도승지·춘천부사 등을 지냈다. 1583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선조의 미움을 사 창원부사로 좌천됐다.

심학·성리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저서로는 ‘성리유선’, ‘공문심법유취’, ‘강목심법’, ‘소고집’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 안집사로 영남지방의 민심을 수습하고, 대사헌으로 ‘시무 16조’ 상소를 올린 김륵 또한 이산서원이 배출한 문인이다.

서원의 지도문.
◆유림은 알고 있다, 이산의 가치를

조선 말기 서원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최대 900여 곳에 달했다. 초기의 서원은 인재 양성과 선현 배향, 유교적 향촌 질서 유지 등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했으나 차츰 혈연·지연 관계나 학벌·사제·당파 관계 등과 연결돼 수많은 병폐를 낳았다.

이윽고 조선 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소수·도산서원 등 사표가 될 만한 47개 서원만 남겨지고 나머지는 모두 훼철되기에 이른다.

당대 최고의 명성을 자랑했던 이산서원 역시 훼철을 피하지 못했는데, 이는 도산서원과 모시는 선현(퇴계)이 겹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훼철의 역사로 평가절하 되기엔 이산서원의 가치는 결코 낮지 않다.

이산서원은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사액(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는 일)을 받은 서원이다. 사액 순서가 모든 것을 말하진 않지만 900여 곳 중 열 손가락 안에 든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창설 계기 또한 남다르다. 과거 서원은 문중에서 돈을 각출해 선현을 모신 후 유생들을 교육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바꿔 말하면 강학보다 제사의 기능이 우선시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산서원은 본디 학문을 숭상하던 지역 풍속에 따라 선비들이 모여 과거 공부 등을 하던 ‘거접’에서 유래했다. 1571년까지 13년을 묘우 없이 유생 교육을 운영했다. 제사보다 교육의 기능이 앞선 드문 사례인 셈이다.

특히 이산서원은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가장 먼저 위패를 모신 서원이었다. 창설 초창기에 퇴계 선생으로부터 지도와 조언을 많이 받았는데 각 건물의 이름 또한 퇴계 선생이 직접 지었다. 퇴계 선생이 손수 지은 이산서원 원규(규칙)는 이후 전국 모든 서원 원규의 표본이 됐다.

◆이산의 현재, 그리고 미래

한때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했던 서원은 현대사회 들어 전통과 미래를 잇는 연결고리로 새롭게 재해석되고 있다. 공동체 안에서 유교적 인문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교육기관으로 도덕과 인문학 중심으로 진행된 서원 교육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가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영주시가 옛 것으로 여겨졌던 선비 문화를 다시 전면에 내세운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유교 문화 중심지였던 조선 중기 영주의 위상을 되찾겠다는 복안이다.

운영위원회 17명, 별유사 3명으로 구성된 이산서원 운영위원회는 영주시와 발맞춰 이산서원을 현대사회 인성교육의 장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세속적 이익보다 대의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선비정신은 어쩌면 시대에 역행하는 이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른을 공경하고 예의범절을 중시했던 선비문화가 현재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합리적 국가 운영 시스템의 원천이라는 점에는 두 말할 여지가 없다.

이산서원에서 양성된 현대사회 선비들이 세계인을 감동케 할 거대한 물결을 일으키는 그 날을 상상해 본다.

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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