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구도자

발행일 2020-11-02 10:04:16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박헌경 변호사
박헌경

변호사

단풍이 절정에 이르고 있다. 예년 같으면 버스를 대절해 단풍 구경을 가려는 행락객들로 인해 고속도로 휴게소가 버스와 사람들로 발디딜 곳없이 붐빌 것인데 올해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예년 같지 않게 조용하다. 대신 가까운 팔공산을 찾아 깊어가는 가을을 느끼려는 자가용 행렬은 길게 늘어서 있다. 단풍이 절정에 이르러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단풍잎은 낙엽이 돼 길에 뒹굴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래서 가을이면 우리는 더욱 옷깃을 여미게 되고 인생이 무엇인가 자연 앞에 스스로 겸손해진다.

그를 처음 만난 것도 단풍이 이렇게 절정에 이른 깊어가는 가을날이었다. 15년전 합천 해인사 가는 길에 있는 작은 찻집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찻집을 그의 부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자르지 않고 어깨까지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있었다. 입가에 항상 미소를 머금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를 가진 그와 마주앉아 차를 마시며 긴 시간 담소를 나눴다. 주로 종교와 철학, 역사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지나온 삶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은 것 같다. 그의 깊이 있는 안목과 고뇌를 읽을 수 있어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나이도 나와 갑장이라 더 가까워질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소탈하고 기분좋은 분위기를 가진 그를 만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인지라 그 뒤로 몇 번 더 해인사 그 찻집을 찾아 그를 만났다. 그는 수염을 깎지 않고 길렀고 허름한 옷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으며 걸을 때는 나무로 만든 큰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지리산 청학동으로 도를 닦으러 입산해 들어가버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청학동으로 떠나기 전에 그의 부인에게 무릎을 꿇고 삼배 절을 올리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로부터 5년 후 청학동을 나와 경북 영주에서 오래된 촌집을 무상으로 임차해 개조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만나러 영주에 몇 번 다녀왔다. 머리는 여전히 치렁치렁 기르고 있었지만 그의 몸가짐과 목소리는 더 큰 울림이 있었고 얼굴은 맑았다. 기분좋고 소탈한 웃음소리도 여전했다. 채식을 주로 하는 그와 나물반찬 밥상을 마주 하고 앉았더니 열어놓은 장짓문 밖으로 향기로운 솔바람이 불어오고 뻐꾸기 울음소리가 참으로 평화스러웠다. 속세를 떠난다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속세의 집착을 버려야 하는 것인가 보다.

영주에서 1년여를 지냈던가? 그는 다시 지리산으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의 소식을 오랫동안 듣지 못하다가 최근에 그가 진주 인근 산에서 해탈선원을 지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말을 맞아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친구와 둘이서 승용차를 운전해 그를 만나러 해탈선원으로 달렸다. 합천을 거쳐 진주를 지나 산청 가까운 산에 자리잡은 해탈선원을 찾았다. 시골길과 산길을 달려서 한참 들어간 곳에 해탈선원 수덕사가 있었다. 시간을 수십년 거꾸로 되돌려놓은 듯한 수덕사에 도착하니 돌계단에 빗방울이 무수히 떨어지고 뒷산에는 우연이 가득했다.

절이라고 하지만 오래된 시골집을 개조해 부처님을 모시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그는 합장하며 함박웃음으로 기쁘게 맞아주었다. 황토흙집에 한지를 발라놓은 방에서 그는 차를 우려 우리에게 대접했다. 10년만에 다시 만난 그는 그토록 치렁치렁 길렀던 머리카락을 자르고 머리를 깎아 스님이 돼 있었다. 모든 것이 단촐하고 검소했다. 너무나 검소해서 역시 불법을 배우고 수도하는 구도자의 모습은 이런 것이어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비는 창밖에서 계속 내리고 그가 따라주는 차에는 그의 인간적인 향기가 스며있는 것 같다.

현대의 종교인은 너무 세속화되고 물질적으로 풍족해졌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비구는 누더기 옷을 기워입고 식사는 탁발을 해서 얻어먹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것이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청정비구의 모습일 터이다. 비단으로 만든 가사장삼과 제의를 거치고 거룩하게 떠받들어지는 것이 종교인의 참모습은 아닐 것이다.

비가 내리는데도 그는 절 입구까지 내려와 돌아가는 우리를 향해 허리를 굽혀 합장을 한다. 웬지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조만간 다시 한번 찾아갈 것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남기고 대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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