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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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하얀 꽃을 잔뜩 달고 있는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철 푸른 잎으로 차도와 인도의 경계에 서서 지나는 이들에게 말 없는 싱그러움을 주는 나무 피라칸타다. 어느새 하얀 꽃을 피워내 제 소임을 시작했음을 알린다. 뜨거운 여름에도 푸른 잎으로 꿋꿋이 서 있다가 가을이면 정열적인 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아 결실의 계절이 왔음을 알린다. 하얀 눈이 내리는 한겨울에도 두꺼운 눈을 잔뜩 뒤집어쓰고 빨간 열매를 지키며 추위를 씩씩하게 견디며 움츠린 이들에게 기운과 격려를 보탠다.

신록이 짙어가는 나무들 사이에는 팬지, 피튜니아, 베고니아가 조용히 무탈하게 있다는 소식을 알리고 울타리 너머 정원에는 첫사랑이라도 떠올리라는 듯 갖가지 색의 영산홍이 피어있다. 마음이 들뜨는 봄이다.

밖으로 나가 봄을 즐기는 대신에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뤘던 일을 드디어 시작했다. 신기하게 정리하기로 했다. 우선 책장을 가득 채우는 책부터 버리기로 했다. 책을 꺼내 먼지를 털고 차곡차곡 상자에 담아 쓰레기장에 가져다 뒀다. 누군가 필요한 이들은 가져갈 것이고 아니면 폐지로 나가지 않겠는가. 그중에는 아들의 국어책도 있었다. 버리려고 혹시 중요한 서류라도 끼어 있을까 싶어 뒤적이다가 어느 시인이 쓴 수필을 읽게 됐다.

한국을 떠난 미국의 애리조나주 투손시의 인디언 축전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 티피 안에서 인디언 노인들과 흥미 있는 대화를 주고받으리라고 기대했던 나는 아주 뜻밖의 일을 경험했다. 티피 안으로 들어가 그들과 마주 앉자마자, 내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이며, 인디언 세계에 무척 관심이 많고,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했다. 인디언의 철학과 역사를 많이 알고 있다는 것도 넌지시 내비쳤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티피 안이 어슴푸레해서 그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는 건지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티피마다 그런 식이었다. //…중략…//얼마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것이 인디언 부족의 전통인 것을 알았다. 누군가를 만나면, 그들은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그렇게 한동안 침묵으로 상대방을 느낀다고 한다.

자기 앞에 있는 존재를 가장 잘 느끼는 방법은,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침묵을 통해서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 후, 미국에서 돌아와 나는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인디언 흉내를 내곤 했다. 상대방의 존재를 느낀답시고 입을 다물고 5분이고 10분이고 앉아 있었다. 그 결과가, 아주 괴팍하고 거만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다. 침묵은 흉내가 아니라 존재의 평화로움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임을 미처 몰랐다. ​몇 번의 여행을 인디언과 함께 하면서 나는 그들에게서 여러 개의 인디언식 이름을 얻었다. 그중의 하나가 ‘너무 많이 말해’였다. 내가 뭘 얼마나 떠들었기에 그런 식으로 나를 부르는가 따지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너무 많이 따져’라는 이름을 또 얻게 될까 봐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 고백하지만, 나는 그들의 침묵에는 턱없이 모자랐고, 그들의 말에는 더 없이 넘쳐났다. 나는 이생에서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살지는 않는지? 류시화 시인의 ‘나의 모국어는 침묵’ 이라는 글이었다.

나는 아들들에게 또 나의 지인들에게 이 글을 보내봤다. 그랬더니 아들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아야 하겠네요”라는 답이 왔다. 여동생은 “입 다물라고”라는 문자로 즉시 응답했다. 글을 다 읽고 보냈을까? 아니면 그냥 답부터 하는 것이 예의라고 시작한 것일까 싶었다. 여러 가지 응답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베트남 어머니를 가진 초등학생 아이가 하루 지나서 보내온 답장이었다. 그 아이는 글을 잘 읽었다면서 이제는 사람을 만날 때 먼저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겠다는 다짐까지 했다.

라코타족 인디언인 ‘서 있는 곰’은 말한다. “침묵은 라코타족에게 의미 있는 것입니다. 라코타족은 대화를 시작할 때,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지는 것을 진정한 예의로 알고 있습니다. 슬픈 일이 닥치거나 누가 병에 걸리거나, 또는 누가 죽었을 때, 나의 부족은 먼저 침묵합니다. 어떤 불행 속에서도 침묵하는 마음을 잃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직접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소통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요즘이다. 자주 소통하는 것 같지만, 끝까지 읽지 않고 잘 듣지 않고 내 말부터 먼저 하지는 않는지, 침묵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지 않으랴 싶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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