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운석

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

직업상(?) 맥주를 자주 마시는 편이다. 국내 소규모양조장에서 생산되는 수제맥주 뿐 아니라 외국에서 수입되는 맥주도 종류별로 마셔본다. 때로는 맥주 수입회사에서 시음후기를 부탁하는 경우도 있으니 꽤나 자주, 스타일별로 다양한 맥주를 마신다고 할 수 있겠다.

수입되는 맥주 중에서 가끔 한 번씩 캔 맥주 본래의 이름을 흰 종이로 붙여 보지 못하게 가려서 국내에 출시하는 경우가 있다. 지난해 수입된 ‘유 캔트 핸들 더 주스(YOU CAN’T HANDLE THE JUICE)’라는 캔 맥주가 그랬다. 캔의 라벨에서 ‘주스(JUICE)’라는 단어를 흰 종이로 가리고 나서 유통시켰다. 아마도 내용물은 맥주인데 주스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미성년자들이 헷갈릴 우려가 있어서일 것이다.

미국에서 ‘도파민(Dopamine)’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되고 있는 맥주가 수입될 때도 그랬다. 유성 매직펜으로 도파민 글자를 덧칠하고도 모자라 그 위에 흰 종이를 붙여 완전히 가리고 나서야 통관이 됐다. 도파민은 행복감과 쾌락을 느끼게 하는 신경전달물질 중 하나다. 중독성 강한 호르몬 중의 하나이다보니 식약청에서 부적당한 이름이라고 본 모양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맥주를 찾게 되는 이유도 도파민과 관련이 있다. 미국 인디애나의과대학 연구팀이 성인 남성 4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두 차례의 실험결과가 흥미롭다. 이온음료 15㎖와 맥주 15㎖를 각각 마시고 15분 뒤 뇌 활동을 촬영한 결과 이온음료를 마셨을 때보다 맥주를 마셨을 때 뇌 속 도파민 생성이 더 늘어난 것을 확인한 것이다. 15㎖라는 매우 적은 양의 맥주 속 알콜에도 도파민이 생성된다는 것은 알콜이 아닌 맥주 자체의 맛만으로도 도파민 분비를 유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달리 표현하면 맥주의 알콜 성분 때문이 아니라 맥주 자체의 맛이나 향만으로도 도파민이 생성돼 맥주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도파민 외에 엔도르핀은 재미와 즐거움을, 세로토닌은 흥분시키는 기능을, 옥시토신은 신뢰감을 느끼게 해주는 신경전달 물질이다. 의학계에서는 행복과 관련된 이들 호르몬이 부족하면 우울감과 불안감을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반면, 뇌에서 충분한 양의 이들 호르몬이 분비되면 암을 치료하고 통증을 완화시키는 데도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고 말한다.

몇 년 전, 의학계는 엔도르핀보다 4천 배의 치료효과가 있는 ‘다이돌핀(Didorphin)’이라는 호르몬을 발견해냈다. 다이돌핀은 주로 무엇인가에 감동 받았을 때 생성된다고 알려져 있다. 도파민이 쾌감 호르몬이고, 엔도르핀이 행복 호르몬이라면 다이돌핀은 감동 호르몬인 셈이다.

다이돌핀은 큰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받을 수 있는 아주 작은 감동에서 분비된다. 최근 SNS에 많이 올라오는 황홀한 일몰 풍경을 볼 때라든지, 좋은 음악을 들을 때, 사랑에 빠진 상대에게서 작은 선물을 받을 때도 다이돌핀은 생긴다.

그렇다면 온 국민이 다이돌핀을 생성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지난 4월 국제 구호개발 NGO(비정부기구)인 세이브더칠드런 홍보대사에 위촉된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바이오·뇌공학과 교수는 “나에 대해 좋은 일을 하면 도파민이, 타인에게 좋은 일을 하면 도파민과 행복을 느끼게 하는 세라토닌이 함께 분비되는데, 홍보대사로 참여하니 도파민과 세라토닌, 옥시토신이 폭발하는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처럼 남을 위한 나눔과 희생이 가장 큰 감동 아닐까 싶다.

하지만 요즘처럼 뉴스만 들으면 “욱!”하고 치받치는 상황에서는 감동받을 만한 일이 그리 흔치않다는 게 문제다. 들리는 소식이라고는 어둡고, 우울하고, 답답한 뉴스뿐이다. 감동을 받을 만한 잔잔한 미담조차 드물다.

젊은층의 일자리걱정은 여전하고, 희망없는 이들의 주식투자, 가상화폐 투기의 부작용만 해도 심각한 수준이다. 경제 문제에 교육문제, 부동산 문제까지 첩첩산중이다. 그렇다고 정치판이 잘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희망은 일상 속 작은 감동의 물결이다. 작은 물결이더라도 자주 일렁이다 보면 언젠가는 도파민 뿐 아니라 다이돌핀까지 듬뿍 분비시켜주는 날이 오지 않겠나.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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