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정리가 끝났다. 이제 나를 기다리는 환자를 맞아 찬찬히 진료하면 된다. 용기 하나만으로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개업, 그 준비가 그렇게나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이 많은 줄 처음엔 몰랐다. 찬찬히 그냥 준비해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이웃과 더불어 오순도순 정답게 진료하면서 살아가면 보람이 크지 않을까 싶었다.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이기에 생소해 신기하게도 느껴졌다. 여름 더위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느낄 겨를도 없었다. 밥을 먹었는지 배가 고픈지도 모르고 뛰어다녀야만 했다. 준비할 것과 결정할 사항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 시간이 지날수록 그야말로 정글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개업의사의 생활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역동적이리라는 것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아묻따’,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시 달려가 보기로 한 앞으로의 생활, 마음 같아서는 33년쯤 더 해야만 할 것 같다.

곳곳에 좋은 사람들은 있어서 도와주는 이들이 많아 그래도 다행이었다.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는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을 굳게 믿으며 오늘의 이 노력이 헛되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더운 여름날, 수시로 공사 현장을 찾아와 조언해준 이웃들이 고맙고 그래서 행복하다. 날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저녁이면 진한 감동으로 가슴이 먹먹해 오곤 한다.​ 그대들이 있기에 오늘 내가 여기에 다시 자리 잡을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 이 자리에서 믿을 수 있고 든든한 보호자 같은 의사로 이웃과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요양기관승인이 나자 이곳저곳에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다. 길 찾기 서비스부터 맵 서비스 각종 렌털 회사까지 시각을 다퉈 긴급한 사항이라며 담당자 통화를 원한다는 전언이다. 일시에 혼란스러워진다. 나의 정보가 이제 만천하에 공개된 것인가.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그동안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바로 결정하곤 했었다. 그래야 일이 진척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외국에서 계속 생활하고 있는 아이들은 나의 이런 상황을 짐작하는지 시간 날 때마다 꼼꼼히 따져보고 의심도 해가면서 일 처리를 잘하시라고 당부한다. 세상은 엄마가 생각하는 것처럼 착한 사람들만으로 구성돼 있지 않으니 꼭 심사숙고해서 결정하란다. 누가해야 할 말을 누가 하고 있는지. 이젠 그 아이들로부터 보호받을 대상이 된 것인가.

몇 주간 모처럼의 자유를 얻었을 때 멀리 나가 있는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직장에 매여 있을 때는 시간을 내기 힘들어서 결심하지 못했는데 이번엔 코로나19 감염증이 발을 묶여버렸다. 할인 사이트에서 싼값에 숙박권을 미리 사 두라고 권유하는 이들도 많았다. 퇴직하고 여유 있게 세상을 두루 경험해보고 생각을 가다듬어 그때에도 꼭 개업해야 한다는 느낌이 오면 천천히 시작해보라고 하는 이들, 무작정 시작하는 나를 안타까워하며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시는 선배도 있었다. 더러는 지금이 여행하기 딱 좋은 때라고 싼값에 나온 여행 예매사이트를 보내주는 여행 마니아들도 있었다.

작년 2월, 코로나 환자가 처음으로 지역에서 나오게 됐을 때 한 지인은 여름방학에 오래 먼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해외여행계획을 잡아뒀다고 한다. 3월, 폭발적으로 생겨 걱정됐지만, 마음 한구석엔 그까짓 바이러스 감염이 길어야 석 달 정도면 끝나지 않으랴 싶었다고 한다. 여름이면 미리 계획한 가족 여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으리라. 하지만 코로나19 감염증은 진행을 멈추지 않고 끈질기게 우리를 위협한다. 계획도 없이 그냥 그날그날 하루 치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라고 종용한다. 오르내리는 숫자가 크게 요동을 쳐대자 여행을 계획했던 그는 당분간 여행하기가 더 힘들어지겠구나 싶어 숙박권을 취소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 절차가 만만하지 않았다면서 속상해 했다. 천재지변 같은 코로나19 때문에 여행을 취소해야 하면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아묻따’ 환불이 이뤄져야 하지 않은가. 하지만 때로는 이상적인 세상과 실제 우리가 부딪는 현실 세계는 꼭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명심하라고 사람들은 조언한다. 코로나19 감염증 때. 숙박 할인업체에 공정위원회가 제기한 시정명령에 대해 법원은 “할인 예약 사이트인 OO 닷컴은 약관 시정 명령 대상 아니다”라고 판결했다. 투명한 가격과 가격 자율성 보장이라면서.

세상이 날마다 바뀌고 있다. 사람도 유행병도 변해간다. 하지만 무엇을 시작할 때는 무모하게 보일지라도 자신을 굳게 믿으며 일단 시작해 봐야 후회가 없지 않던가. 우리 삶의 새로운 날들이 아직 기대에 찬 채 남아 있다. 무모하게 ‘아 묻 따’로 시작하지만 제 길을 바르게 찾아갈 수 있기를, 밝음을 향해 앞으로 잘 나아갈 수 있기를. 붉게 물든 하늘에 둥실 떠 있는 달을 향해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한다.

정명희 정명희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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