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누에 되어 하루를 보내다가/살며시 고개 돌려 지나온 길 다시 본다/혹여나/요긴한 물목 놓고 오지 않았는지//탱탱 여문 말씀의 사리/갈피마다 새겨 있고/슬퍼서 아름다운/상처 아문 자국에도/어느새/민트향 풍겨 온다/설산에서 깨친 화두처럼//잔잔한 여운 남아/뇌리에서 맴돈다/재우쳐 돌아보면 손 떨리는 선율이다/첫새벽/죽비소리가 오목가슴 저민다

「시조세계」(2011, 가을호)

이상야 시인은 2004년‘‘문학사랑’으로 등단했고, 시집으로 ‘풍경소리’가 있다.

‘말씀의 사리’는 최남선 시조집 ‘백팔번뇌’를 읽고 쓴 작품이다. ‘백팔번뇌’는 1926년 12월1일 동광사에서 간행된 최남선의 창작 시조집이다. 시조의 현대화, 시조의 국민문화화의 구체적인 성과물이다. 박한영의 서시 ‘제(題)백팔번뇌’, 홍명희, 이광수의 ‘육당과 시조’, 정인보의 발문이 책 뒤에 실려 있다. 시의 화자는 ‘백팔번뇌’를 통해 말씀의 사리를 생각한다. 충분히 그럴 만하다.

게으른 누에 되어 하루를 보내다가 살며시 고개 돌려 지나온 길 다시 본다. 혹여나 요긴한 물목 놓고 오지 않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백팔번뇌’를 펼치니 탱탱 여문 말씀의 사리 갈피마다 새겨 있고 슬퍼서 아름다운 상처 아문 자국에도 어느새 민트향이 풍겨 오는 것을 느낀다. 설산에서 깨친 화두처럼 말이다. 읽고 나니 잔잔한 여운이 남아 뇌리에서 맴돌다가 재우쳐 돌아보면 손 떨리는 선율인 것을 깨닫는다. 화자에게 그것은 첫새벽 죽비소리가 오목가슴 저미는 일이다. 이러한 정독의 과정을 통해서 시조의 본질에 더 깊이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의지를 다질 수 있다는 점에서 ‘백팔번뇌’는 의미심장한 텍스트다. 시조를 문자유희의 구렁에서 건져내고자 한 최남선의 시조 사랑과 의지가 담긴 시조집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최초의 개인 시조집이므로 시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백팔번뇌’를 눈앞에 두고 읽는 일은 무장 설레는 일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사리’는 시조로 쓴 독후감상문인 셈이다.

그는 또 ‘당신의 빈자리’에서 애절한 노래를 부른다. 아들 아이 양복 한 벌 마련해주는 데도 하루 종일 다리품 팔아 고르고 샀을 당신을 생각하면서 허술한 애비 손길이 어설픈 하루였던 것을 돌이켜본다. 이어서 당신이라면 바느질 안팎 눈 씻으며 살펴보고 가까이 만져 보고 멀리도 세워 보고 아 당신, 당신이었다면 꼼꼼히 챙겼을 것을, 이라고 자탄한다. 그리고 훤칠하게 커버린 키 대견한 듯 다독이며 얄팍한 지갑 생각에 흥정도 질겼을 것을, 이라고 떠올리면서 오늘은 당신 빈 자리 발길마다 허방이었소, 라고 허전하고 허무한 마음을 가감 없이 노정한다. 그렇다면 대체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지만 사적인 정황을 구체적으로 알기보다 미뤄 짐작하면서 읽는 것이 마땅할 터다. 일상에서 비어 있는 공간이 엄연히 있기에 상실감을 종내 떨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이 그렇지 않은가. 언제까지고 그러한 감정에 매달려 있다가 보면 일상이 무너지거나 어지러워지게 된다. 당신의 빈자리를 쓰면서 화자도 그 점을 극복하려고 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어느 덧 칠월이 가고 팔월이 찾아왔다. 매미는 가일층 뜨거운 노래를 부르고 뜰앞 백일홍은 절정의 꽃빛깔을 뿜어낸다. 흡사 매미울음에 화답하는 듯하다. 더욱 뜨겁게 읽히는 시조를 위해 펜을 달굴 일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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