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퉁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 바람 속에서 빛나게 해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풍장」 (문학과지성사, 1995)

70편의 연작시 ‘풍장(風葬)’ 중 첫 번째 작품이다. 황동규 시인은 1982년 ‘풍장 1’을 처음 발표하고 1995년 ‘풍장 70’을 발표했다. ‘풍장 1’은 자신이 죽은 뒤 풍장을 해 달라는 유언 형식의 시다. 풍장은 시신을 지상에 노출시켜 풍화시키는 장례법이다. 서역의 천장이나 조장, 오키나와의 풍장 등과 다른듯하지만 그 바탕은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에선 선유도를 비롯한 서해안 남쪽 섬에서 풍장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생명이 다하면 영혼은 빠져나가고 시신만 남는다. 시신은 존엄성이 떠난, 허물 벗은 의미 없는 거푸집이다. 햇빛에 말리고 바람에 날려 보내며 빗물에 씻겨 보내는 일은 말 그대로 자연스럽다. 풍화작용을 통해 자연 속 영겁의 시간 속에 돌려보내는 과정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을 탄 짐승이나 미물의 먹이로 제공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길일 수 있다. 숨이 붙어있는 동안 수많은 생명을 먹어치운 걸 생각한다면 애써 묻고 태울 필요 없이 쓰고 남은 주검을 돌려주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이를 불가의 몸 공양이나 몸 보시로 이해한다면 부질없는 상상일까.

삶은 자연으로 회귀하는 과정이고 죽음은 무한한 자연의 순환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삶과 죽음은 단절된 세계가 아니라 순환의 고리로 연결된 하나의 세계이고 시공을 초월한 무상의 궤적이다. 삶과 죽음의 관계를 유연하게 바라보는 시각은 불교의 윤회사상과 닿아있다. 풍장은 죽음을 삶의 자극이자 완성으로 수용한 시적 상상력이며 방법론적 장치다.

현실적으로 죽음은 두려운 종결자이긴 하지만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정화시켜주는 절대존재이다. 죽음이 없는 삶은 오만과 타락, 약탈과 약육강식으로 점철된 또 다른 지옥으로 인도할 뿐이다. 죽음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앞만 보고 내달리는 욕망의 기관차를 멈추게 하는 강력한 브레이커로 작용하고 과거를 되돌아보고 성찰하게 하는 마법의 거울로 기능한다. 삶은 죽음이 있어 비로소 아름답고 죽음은 삶이 있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시 ‘풍장’은 존재의 소멸을 통한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메시지를 주지적이고 상징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죽음과 삶의 황홀은 한 가지에 핀 꽃’이고 ‘죽지 않는 꽃은 가화’라는 시인의 말처럼 삶은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 꽃인지 모른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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