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창으로 보이는 하늘이 맑고 푸르다. 비 갠 뒤 흰 구름이 산허리를 두르고 있다. 가을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옴을 느낀다. 이제 목청껏 울어대던 저 매미 소리도 머잖아 사라질 것 같다. 낮이 저물면 밤이 찾아오고 무더운 여름도 때가 되면 소리 없이 물러나 가을이 찾아온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 참으로 오묘하다. 서늘한 가을바람에 기대어 늦도록 책을 읽으며 하루의 시간을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왠지 설렌다. 제 아무리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려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가을은 막을 수 없으리니.

신기한 공간에서 진료를 시작한 지 3주가 지났다. 소식을 몰라 찾아오지 못했다며 늦게라도 찾아와 응원해주는 이들이 있어 날마다 신난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보내준 아름답게 빚은 도자기 선물. 어디에 놓으면 그분의 인품을 잘 기억할까. 햇살과 바람이 잘 통하는 진료실에 두고 어느 여행지에서 가져온 바나나 잎을 꼬아 만들었던 작품을 꽂아 두었다. 더없이 멋지다. 길 건너편에 계시는 선배님은 한가한 시간이면 창을 열고 손 내밀어보라며 전화를 하신다. 가까운 곳에 마음으로 의지가 되는 분이 계신다고 생각하니 참 든든하다. 느닷없이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나 얼른 알아차리지 못해 당황하는 내 모습에 소년처럼 박장대소하는 노익장이라 더 친근하다.

쏟아지는 장대비를 뚫고 여고 동창생이 찾아왔다. 꿈 많던 갈래머리 여학생 시절에 만나 지금까지 좋은 일 슬픈 일 서로를 챙겨주고 있다. 대학생만 되면 무전여행을 해보리라 다짐했던 아이들, 대학 1학년 여름방학, 울릉도로 무전여행을 떠났었다. 풍랑에 마구 흔들리는 배를 타고 버티기 힘들어 배 바닥에 모두 드러누웠다. 멀미가 너무 심해 도착할 즈음엔 초주검 상태였었다. 그때 그 섬에서의 일주일은 꿈같은 시간이었다. 새벽 바다를 훤히 밝히는 오징어 배, 그것을 타고 먼바다로 나가보고 싶어 선장님께 부탁했다. 단호히 거절당했다. 여자가 배에 오르면 바다의 신이 화를 내어 풍랑을 일으킨다나? 간청하는 우리의 소망을 단칼에 끊어버렸다. 지금 울릉도 오징어 배가 여성을 태워주는지, 성인봉은 잘 있는지, 배가 닿는 위치의 그 성당은 어찌 변했는지 몹시 궁금하다. 그때를 되새기면서 추억을 더듬다가 한 친구가 아련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때의 경험만 떠올리면 우리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와도 모두 다 쉽사리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우리들의 여행, 앞으로의 살아갈 날들, 그런 이야기로 좋은 인연을 이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더없이 즐겁다.

오랜만에 찾아오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어찌 표할까. 알아보니 맛있게 먹을 만한 곳이 근처에 참 많았다. 서남시장이라고 검색하면 ‘족발’이 나올 정도라고 한다. 콜라겐이 풍부하다고 알려진 족발이라 젊은이들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가마솥에 푹 고아 식혀서 포장한 쫀득쫀득하고 시원한 족발부터 따스한 족발에 마늘 소스를 곁들인 메뉴까지 보기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일 정도라고 한다. 가게에는 신선하게 튀겨놓은 튀김이 가득하고 나이든 동서 둘이서 운영하는 국수 가게에는 차가운 잔치국수를 먹으려는 손님들로 북적인다. 일터가 시장 가까이에 있다 보니 그분들의 활기가 그대로 전해온다. 출근과 퇴근 시간 모두 기를 듬뿍 받아서 신나게 생활한다. 날마다 때마다 마수걸이라면서 반겨주시는 노점상 아주머니는 맛있게 보이는 햇땅콩을 됫박이 넘치도록 담아 건네주신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분들을 가까이에서 만나보면서 감사함이 여유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지나는 길손에게 인사하며 감사하고, 물건 사는 이들에게 좋은 얼굴빛과 친근한 목소리로 보시하면서 잘 참아내는 선한 이웃들이 있어서 근심도 걱정도 없이 마음 편하게 배우며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아 감사하다. 조금 어렵더라도 더 조금만 참으면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더 좋은 영향을 주지 않던가. 어릴 때부터 키가 잘 안 자라서 병원에 다녔지만, 별 이상을 발견하지 못해 그냥 지냈다는 젊은 어머니, 그녀가 둘째 아이를 가지려고 하던 중에 염색체이상을 발견했다. 터너증후군이었다. 성장호르몬을 보험으로 처방받아서 키 성장을 도울 수도 있었던 질병인데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딸 키 걱정만 할 뿐, 후회도 원망도 하지 않았다. 화를 내면 본인에게 좋지 않을 뿐 아니라 더 중요한 일을 망치게 된다고 생각했을까.

부러진 톱자루를 덧대어서 뚝딱 고쳐주는 할아버지처럼 환자와 보호자의 아픈 마음을 잘 어루만지고 잘 보듬어서 얼굴을 밝게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가끔은 우연히 들러봤다는 반가운 인연을 다시 만나는 기쁨도 느끼면서.

하루하루 숙제가 아닌 즐거움이 가득한 축제의 날이 되기를, 나의 일터가 신기한 놀이터가 되기를, 가을의 길목에 서서 간절히 기도한다.

정명희(정명희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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