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들의 푸른 명상」 (민음사, 1994)
벽시계와 탁상시계, 손목시계는 시인의 상속권자다. 어느 날, 시인이 옆에서 자고 있는데 유산을 둔 논쟁이 셋 사이에 벌어졌다. 미리 찜해놓은 값나가는 유산을 서로 차지하고자 상대방에게 그 정당성을 나름대로 설득하고 있다. 뉴스나 구전으로 상속 다툼을 듣긴 했지만 직접 당하긴 처음이다. 옆에서 잠든 척 하고 있자니 기가 막힌다. 절로 헛기침이 나온다.
벽시계는 가장 오랫동안 함께 했다는 이유로 상징성 있는 외투를 희망한다. 외투는 집 정도일 수 있을 듯하다. 탁상시계는 시간을 허송하지 않도록 관리하고 통제한 점을 들어 외투와 구두를 요구한다. 구두는 패물이나 장신구를 상징하는 지도 모른다. 손목시계는 험한 일을 도맡아 하고 뒤치다꺼리를 다했다는 걸 내세워 그에 상응하는 정당한 몫을 내놓으라고 난리다.
각자의 주장이 근거 없진 않다. 허나 어떤 일이든 순서와 타이밍이 있는 법이다. 유산 배분은 사망한 이후 장례를 치른 다음 거론할 성질의 것이다. 사자가 직계 존속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다. 애도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유산 상속이다. 누구든지 사망하면 유산 상속이 진행되지만 인간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전제가 조건으로 존재한다. 멀쩡한 피상속인 옆에서 유산 다툼을 벌이는 모습은 꼴불견이다.
일생을 일정 기간의 시간으로 본다면 시간의 흐름을 구분하는 시계는 그 기간의 특정 부분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시계를 상속권자로 의인화한 근거일 것이다. 구체적 가족관계를 밝히는 부담을 회피하는 의미도 갖는다. 하찮게 얻은 외투 따위의 거푸집에만 관심을 가지고 평생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나 알맹이엔 무관심한 세태를 유머와 위트로 은근히 풍자하고 있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