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 전화를 열어 헤아려 봤다. 구성원이 30명 넘는 단체 카톡이 10곳이 넘는다. 100명이 넘는 단톡도 3곳이다. 내가 주도해서 만든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자진해서 들어간 곳도 없다. 적절한 시기에 다 나올 생각이지만 현재로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나올 수가 없어 그냥 머물러 있다. 1시간쯤 무엇에 몰두하다가 전화기를 열어보면 메시지가 100개 이상 들어와 있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평상시 휴대 전화기의 모든 알림을 무음으로 해 둔다. 진동도 꺼놓기 때문에 문자나 카톡에 즉시 반응하거나 답을 못할 때가 많다. 중요한 전화를 제때 못 받아 낭패당하거나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구성원의 정치적 성향이 비슷한 단톡에서는 한 사람이 다른 진영을 비난하는 기사나 출처 불명의 가십성 이야기를 올리면 순식간에 모두가 집단으로 흥분한다. 누가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이쪽 진영에도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며 신중론을 펼치면 집단 린치를 가할 분위기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는 사람이 많다. 진보 성향의 단톡에서는 절대로 정권을 넘겨주면 안 되기 때문에 이쪽 특정 후보가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지지할 수밖에 없다며 선거인단에 신청해 달라고 한다. 걸핏하면 청와대 청원에 동참해 달라는 요청도 한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인증샷을 올린다. 진보 쪽은 굉장히 전투적이고 집요하다. 보수 성향의 단톡은 상대 진영의 내로남불 사례와 정권 교체를 하지 않으면 국가의 존립 기반이 붕괴하고 결국은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쪽저쪽 할 것 없이 밤낮으로 글을 올리며 이야기를 주도하는 사람이 몇 명씩 있다. 그들은 상대 진영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나 반드시 청산해야 할 적폐 또는 패륜 집단으로 간주한다. 수십 명이 가입해 있는 단톡은 정치의 축소판이다.

강준만 교수의 저서 ‘증오 상업주의’는 현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과격파가 과잉 대표되고 중도파가 과소 대표되는 메커니즘은 의제 설정을 왜곡”한다는 말은 누구나 쉽게 수긍할 것이다. “정치와 언론의 양극화가 낳은 ‘증오 모델’이 ‘극한 당파 싸움’을 낳고 국민의 정치 환멸을 재생산한다”라는 말은 현 정치판에 그대로 적용된다. 증오와 편 가르기가 정치의 주요 동력으로 작용하는 곳에서는 중도파가 설 자리는 위축되고, 자기 진영에 대한 반성이나 성찰을 주장하면 ‘악의 편’으로 매도당해 자기편으로부터 문자 폭탄 세례를 받게 된다. 선악 이분법은 진보나 보수 모두가 즐겨 사용한다. “증오 상업주의로 일순간 승리할 수는 있지만,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기 어렵고, 궁극적 승리를 거둔다 해도 그것이 지속 가능한 승리일 수 없다는 데 증오 상업주의의 비극이 있다”는 지적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다수결주의하에서는 승자독식 원칙이 지배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정치적 경쟁은 죽고 사는 게임이 될 것이다. 다수결주의하에서는 51%의 다수만으로 승자독식이 가능하다. 즉 51%의 의사가 일반 의사가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소수파의 요구를 억압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다수파 독재를 할 수 있다. 이런 다수결주의 원칙은 한국과 같이 지역 갈등으로 쪼개진 사회의 통합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라는 말에도 공감한다. ‘언론중재법’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양당제 체제하의 투표 행태는 반감 투표, 또는 증오 투표 양상을 보인다. 믿고 지지할 만한 정당이 없는 상황에서 더 반감을 느끼거나 더 증오하는 ‘최악’의 정당을 응징하기 위해 ‘차악’의 정당을 선택하는 투표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투표 행태를 잘 아는 정당들은 비전 제시나 정책 대결로 유권자의 표를 얻을 생각은 하지 않고 상대 정당을 공격해 유권자들의 반감이나 증오를 키우기 위한 ‘증오 마케팅’에만 몰두하면서 이걸 정치의 본령으로 삼는다. 그로 인해 생겨나는 정치 혐오는 국가 전체에는 재앙이지만 정치인들에겐 속된 말로 남는 장사다. 거대 양당은 국민이 보는 앞에서 서로 죽일 듯이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적대적 공생 관계를 믿고 있는 한통속이라는 말에도 공감한다. 정치 개혁은 문화 개혁이며 이를 위해서는 의식과 행태의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새겨볼 말이다. 어디에도 부화뇌동하지 않는 깨어있는 국민이 늘어나야 정치의 저질화를 막을 수 있다.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대표)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