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알지 후손인 내물왕 46년간 재위…김씨 왕위세습체제 마련

▲ 신라 제17대 내물왕의 릉은 월성의 서쪽의 모습, 교촌마을과 연접해 있다. 동부사적지 첨성대와는 500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 신라 제17대 내물왕의 릉은 월성의 서쪽의 모습, 교촌마을과 연접해 있다. 동부사적지 첨성대와는 500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신라 제17대 내물왕은 김씨로는 신라 최초의 왕이 됐던 미추왕의 조카이자 사위로 삼국사기 등에 기록돼 있다. 신라시대의 결혼문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뚜렷한 자료가 된다.



미추왕이 김씨 최초로 왕이 됐던 것처럼 내물왕도 김씨의 왕위세습을 이뤄 낸 역사적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내물왕은 비록 백제를 견제하고자 고구려의 힘을 빌려 고구려의 내정 간섭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고구려, 백제와 함께 본격적인 삼국시대를 열었다.



내물왕은 김씨의 시조로 모시는 김알지의 배려로부터 시작됐다. 알지가 태자로 책봉됐지만 왕위에 오르지 않고 딸들을 파사왕과 지마왕의 왕비로 채택되도록 해 김씨 세력을 착실하게 넓히는 기반을 만들어 김씨들의 왕위세습 기반을 마련했다.



내물왕은 46년이나 장기집권하면서 철저하게 왕권강화를 위해 조직과 제도를 정비하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면서도 철저하게 김씨 가문의 세력 확장을 위한 안배를 했다. 실세로 떠오르던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는 등의 내적 갈등요인 제거와 같은 정책도 과감하게 펼쳤다.





▲ 내물왕릉으로 지정된 고분의 서쪽 300여m 지점에 봉분의 정상부근이 내려앉은 고분이 내물 왕릉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 내물왕릉으로 지정된 고분의 서쪽 300여m 지점에 봉분의 정상부근이 내려앉은 고분이 내물 왕릉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기록 속의 내물왕

신라 제17대 내물왕은 356년에 왕위에 올라 402년까지 46년 동안 왕위를 이어갔다.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미추왕의 동생인 각간 말구, 어머니는 휴례부인 김씨이다. 부인은 미추 이사금의 딸인 보반 부인 김씨이다.



내물왕은 당시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하면서 국가적 면모를 일신해 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또 귀족 회의를 주관해 정사를 주재하는 명실상부한 최고 통치자로 군림했다.



또 내물왕 이후에는 박·석·김의 삼성이 왕위를 교대로 계승하는 대신 김씨에 의한 왕위의 독점세습이 시작됐다. 내물왕이 46년이나 장기 집권하면서 안정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강화한 왕권에서 비롯된 일이다.





▲ 계림 중심부에 위치한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내력에 대해 기록한 계림비각.
▲ 계림 중심부에 위치한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내력에 대해 기록한 계림비각.


내물왕대에 신라가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한 것으로 본다. 백제 근초고왕의 마한 정복과 백제군의 낙동강 유역으로의 진출이 신라에 자극을 주었을 것으로 분석한다.



당시 백제가 왜와 연합하고 왜병을 끌어들여 364년과 393년 등 여러 차례 신라를 침범하자 이들에 대항할 목적으로 신라 내부를 통합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



신라 단독으로는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을 물리칠 수 없었기 때문에 내물왕은 우호적 관계에 있던 고구려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해 결국 고구려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됐다.



399년 내물왕이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자 광개토왕이 5만 명의 군사를 신라의 국경지대로 파견해 백제군과 연합한 왜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신라의 자주적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내물왕 때에 전국에 관원을 파견해 백성들을 위문하거나 흉년이 든 하슬라(지금의 강릉) 지방의 백성들에게 1년 동안 세를 면제해 민심을 수습하기도 했다.



357년 봄에 왕은 사자를 각지로 파견해 늙어서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위문하고 각각 그들에게 곡식 석 섬씩을 하사했다. 또 효제로서 그 행실이 유달리 뛰어난 사람에게는 관직을 줬다.



▲ 계림비각이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 계림비각이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364년 4월에 왜병이 크게 침입하자 왕은 풀로 허수아비 수 천개를 만들어 옷을 입힌 다음 사람처럼 만들고 각각 병기를 들려 토함산 밑에 세우고, 용사 1천 명을 부현(현 경주 부근) 동원에 복병으로 배치 시켰다.



왜병들이 자신들의 숫자가 많은 것만 믿고 그대로 진격해 오자 급히 복병을 일으켜 이를 격파하니 적들은 불의의 습격을 받고 대패하고 도망갔다. 이에 신라군은 적을 추격해 거의 다 격살했다.



373년 백제의 독산성(현 영평) 성주가 남녀 300명을 거느리고 항복해 오자 왕은 이들을 받아들여 6부에 나눠 살게 했다. 백제 근초고왕은 편지를 보내 “양국이 서로 화친해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는데 우리나라에서 도망한 백성을 거두시니 이는 화친하는 뜻에 심히 어긋나는 일”이라며 도망한 백제 백성들을 돌려줄 것을 요청했다.



내물왕은 “백성들은 상심이 없는 것으로 생각이 나면 오기도 하고 마음에 싫으면 가버리기도 하는 것을 구태여 만류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대왕은 백성들의 불안한 것을 걱정하지는 아니하고 도리어 과인을 책망하시니 심한 일”이라 답하고 응하지 않아 서로 벽이 생겼다.



393년 왜인들이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하고 5일 동안이나 공격했다. 장병들은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했으나 왕이 “지금 적들은 배를 타고 깊이 사지에 들어와 있으므로 그 예봉을 가히 당하기 어려울 것이다”면서 서문을 굳게 닫고 지키기만 했다.



적들은 공격이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퇴주했다. 이때 왕은 날랜 기병 200명을 파견해 적의 퇴로를 끊고, 뒤이어 보병 1천 명을 파견해 독산(현 영일)까지 추격해 이를 사방으로 포위하고 크게 격파했다. 당시에 적을 참획한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 김알지가 탄생한 곳으로 전하는 계림에는 화랑 기파랑을 노래한 향가비가 있다.
▲ 김알지가 탄생한 곳으로 전하는 계림에는 화랑 기파랑을 노래한 향가비가 있다.


397년 북변의 하슬라(현 강릉)에 한재와 함께 메뚜기떼로 인해 흉년이 들고 백성들의 기근이 심했다. 그러자 왕은 죄수들을 놓아주고 1년 동안의 세금을 면제했다.



399년 메뚜기떼가 들판을 뒤덮고, 400년 봄과 여름에 한재가 들었다. 7월에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실성이 돌아왔다. 402년 내물왕이 죽었다.



내물왕은 고구려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392년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일이 후일 신라의 왕실에 피바람을 일으키는 혼란을 가져왔다.



내물왕이 죽은 뒤에 401년 고구려에서 귀환한 실성은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내물왕의 여러 아들들을 배제시키고 왕위를 계승했다.



▲ 계림에는 1300년 수령의 회화나무가 본줄기는 밑둥이 잘려나가고 수피에서 가지가 자라고 있다.
▲ 계림에는 1300년 수령의 회화나무가 본줄기는 밑둥이 잘려나가고 수피에서 가지가 자라고 있다.




◆계림과 김알지

신라 탈해왕 때 호공이 계림에서 밝은 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가까이 다가가 봤다. 나무 아래에서 흰 닭이 울고 있었고, 그 나뭇가지에 황금궤짝이 걸려 있었다. 그 궤짝에서 빛이 새어 나와 온천지로 퍼지고 있었다.



호공이 탈해왕에게 알렸더니 왕이 직접 숲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보았다. 궤짝에서 남자아이가 누워있다가 일어나는데 눈이 초롱초롱하고 온 몸에서 서기가 퍼져 나오니 새와 짐승들이 춤추며 울었다.



탈해왕은 알지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알지를 안고 궁궐로 돌아오는데 짐승들도 덩달아 날뛰며 기뻐했다.



알지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며 총명하고, 무예 습득도 빨라 그를 이기는 장수가 없었다. 석탈해는 나라를 잘 경영할 재목이라 생각하고 알지를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김알지는 왕위에 오르지 않고 유리왕의 아들 파사가 왕위를 잇게 하고 왕비로 김씨가문의 여인들을 천거했다. 그리고 내적으로 김씨의 세력을 키워나가는 기반을 다졌다.



김알지는 열한을 낳고, 열한은 아도 아도는 수류, 수류는 욱부, 욱부는 구도, 구도는 미추를 낳아 미추가 김씨 최초로 왕위에 올랐다. 이러한 김씨세력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모두 김알지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다.





▲ 계림에는 신라 천년의 역사를 고증이라도 하듯 천년 고목이 아직 100여 그루가 있다.
▲ 계림에는 신라 천년의 역사를 고증이라도 하듯 천년 고목이 아직 100여 그루가 있다.




◆스토리텔링: 내물왕의 정치

내물왕은 미추왕의 사위다. 미추왕의 부인이 석씨왕손의 공주였기 때문에 석씨계에서는 흘해왕이 아들 없이 죽자 석씨계와 가까운 혈통이자 성씨로도 위협적이지 않은 내물을 왕위로 추대하는데 적극 참여했다.



내물왕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신체가 건장하면서 무예에도 뛰어난 인재로 전쟁터에서도 아군들의 우상이 되곤 했다.



왕은 왕위를 이어받고부터는 우선 왕권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제도적 정비와 함께 인재를 고루 적소에 등용했다. 특히 김씨 계통의 인재를 중용해 김씨 세력의 확장을 도모했다.



그러나 같은 미추왕의 후손이면서 권력에 대한 욕심이 많은 대서지의 아들 실성과 그의 세력에 대한 내적인 갈등 구조를 해소하는데도 지나칠 정도로 많은 신경을 기울였다.



▲ 신라 천년을 웅변하는 계림의 노거수.
▲ 신라 천년을 웅변하는 계림의 노거수.


내물왕은 당시 백제가 왜와 손을 잡고 수시로 국경을 쳐들어와 백성들을 괴롭히고, 곡식과 물자를 약탈해 갔다. 이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고구려에 읍소하며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이때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면서 세력을 키워가며 왕권에 은근히 도전하고 있던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버렸다.



왕은 외교에도 세밀하게 신경을 쓰며 정략적으로 대응했다. 이를 위해 백제와 고구려, 왜는 물론 중국에까지 세작들을 이중삼중 적국의 내정에 깊숙이 심어두고 뇌물과 여인들로 색공을 펼치는 등 다각적으로 외교정책을 펼쳤다.



내물왕은 46년이나 왕위에 있으면서 김씨 세력을 두텁게 양성해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한편 외교적으로도 고구려의 힘을 빌어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내물왕도 고구려의 세력을 등에 업고 귀환한 실성의 손에 의해 은밀하게 제거 당했다. 술수에 능했던 실성이 내물왕 죽음 이후 귀족회의를 손에 넣고 왕으로 추대돼 개인적인 원한을 풀어가는 실정을 펼쳐 자신도 비운의 최후를 맞았다.



내물왕의 뜻처럼 내물왕의 아들 눌지가 실성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라 다시 김씨 왕위세습의 뿌리를 튼튼하게 했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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