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문왕의 자녀들 김정, 김황, 김만 차례로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으로 즉위

▲ 경주 남산 북동쪽에 위치해 있는 신라 제49대 헌강왕릉.
▲ 경주 남산 북동쪽에 위치해 있는 신라 제49대 헌강왕릉.


신라 49대 헌강왕은 경문왕의 맏아들이다. 경문왕이 삼십대 중반의 나이에 사망하면서 아들에게 왕위를 넘겼다. 헌강왕 김정 또한 십오륙세의 나이에 왕위를 이어받아 11년 재위하고 이십대 중후반에 죽으면서 동생 김황에게 왕위를 넘겼다.



김황 또한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정강왕으로 즉위했지만 1년 만에 병으로 죽으면서 여동생 김만에게 왕위를 넘겼다. 김만은 신라 세 번째 여왕인 진성여왕으로 등극했다.



진성여왕은 상대등이었던 삼촌 예홍과 혼인관계를 맺었으나 예홍이 일찍 죽자 젊은 화랑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국정을 어지럽게 했다. 귀족들의 원성이 빗발치자 진성여왕은 김예겸이 추천한 헌강왕의 아들로 짐작되는 김요에게 왕위를 순양하고 즉위 10년 만에 물러났다.

▲ 헌강왕릉의 남쪽 400m 지점에 위치해 있는 신라 50대 정강왕릉.
▲ 헌강왕릉의 남쪽 400m 지점에 위치해 있는 신라 50대 정강왕릉.




◆헌강왕의 정치

헌강왕은 경문왕의 아들로 이름은 정이다. 김정은 어려서 워낙 총명하여 한 번 읽은 글은 모두 외워 그대로 암송할 정도였다.



헌강왕은 아버지 경문왕의 개혁정치를 이어받아 화랑을 비롯한 귀족의 자녀들과 6두품의 자녀들까지 대대적으로 당나라로 유학을 보내고, 유학에서 돌아온 귀재들을 정치에 대거 등용했다. 6두품과 귀족들의 뛰어난 자녀들을 고루 정치에 입문시켜 귀족들의 세력다툼을 완화시키려 했다.



또한 국학과 불교정책을 강화해 황룡사에서 백고강좌를 열어 친히 듣기도 했다. 국학을 통해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고, 황룡사와 망해사 등의 사찰을 중건하거나 건축해 불교의 교리를 널리 펼치는 노력을 기울였다.



또 헌강왕은 수시로 국학에 나아가 박사 이하의 학사들에게 경서의 뜻을 강론하게 하고, 경청하면서 그 뜻에 대해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하기도 했다.

▲ 헌강왕릉에서 정강왕릉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 헌강왕릉에서 정강왕릉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879년 신흥 등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바로 진압해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헌강왕 시대는 비교적 정치가 안정적이었으며, 기후도 좋아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오랜만에 편안한 삶을 영위하는 듯했다.



헌강왕이 880년 월상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서 백성들의 삶에 대해 짐짓 궁금해하는 척하면서 신하들에게 물었다. “요즘 우리 백성들의 삶은 어떠하오?”



당시 신라의 서라벌은 백성들이 옹기종기 밀집해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 기록에 따르면 초가지붕은 없고, 모두 기와로 지붕을 이어 처마와 처마가 잇대어 있어 불국사까지 비를 맞지 않고 왕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신하들이 “서라벌에는 초가지붕도 없고 모두 기와집에서 살며 숯으로 밥을 지어 연기가 나지 않고, 노래 부르며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이러한 축복은 모두 임금님 덕분입니다”라고 왕의 공덕을 치켜세웠다.



헌강왕은 흐뭇해 하면서 “과인의 공덕이라고 할 수만은 없지, 이는 모두 대신들이 백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해준 덕분인 듯 하오”라며 신하들을 칭찬하면서 서라벌을 흐뭇하게 내려다보았다.



당시 헌강왕의 나이는 스무 살 남짓 될 무렵이었다. 헌강왕은 아버지 경문왕의 동생 위홍, 삼촌을 상대등으로 삼아 나라의 대소사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상의하고, 자문을 얻어 정책을 추진했다. 그래서 헌강왕의 정치는 위홍의 정치로 대변되기도 한다.

▲ 헌강왕이 신하들과 잔치를 연 장소인 포석정.
▲ 헌강왕이 신하들과 잔치를 연 장소인 포석정.




◆헌강왕의 나들이

헌강왕은 당나라와 왜까지 원만한 교류를 이어가면서 과감하게 개혁정치를 추진했다. 그러나 많은 업무를 일일이 감내하면서도 사냥과 나라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백성들의 삶을 살펴보는 일에도 크게 관심을 보였다.



헌강왕이 행차할 때마다 곳곳에서 신들이 나타나 경계했다. 당시에는 상서로운 일이라 여겨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신하들을 격려하며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 왕이 신의 춤을 따라 추었는데 그 모습이 자못 신비로워 사람들이 어무상심 또는 어무산신이라 했다. 이때 남산신은 신하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왕의 눈에만 보였다고 한다.



헌강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신과 지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그 춤을 ‘지리다도파’라고 했다. 지리다도파는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알고 도망해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다. 신들이 왕에게 현실의 정치를 경계하기 위해 춤으로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 헌강왕이 남산의 신을 따라 춤을 추었다고 전해지는 포석정의 앞뜰.
▲ 헌강왕이 남산의 신을 따라 춤을 추었다고 전해지는 포석정의 앞뜰.


또 헌강왕이 배를 타고 남해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해무가 자욱하게 일어나 앞이 보이지 않으며 배가 나아가지 않았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일관에게 물었더니 “이는 동해용왕이 왕에게 이를 말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아뢰었다.



이에 왕이 “동해용왕을 위해 망해사 절을 짓고, 용왕의 명복을 빌도록 하라”고 하자 해무가 걷히고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용왕이 나타나 왕에게 “폐하께서 나를 위해 제를 올려주신다니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라면서 “제 우둔한 일곱 자식 중에 막내를 보내드리오니 거두어주시면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라며 처용을 왕의 배에 실어보냈다.



남해용왕의 아들 처용은 헌강왕을 따라 궁궐로 들어와 대신이 되어 나라일을 도왔다. 그러다 역신의 공격으로 아내를 빼앗기고 신라를 떠났으나 백성들에게 역신을 물리치는 비법을 남겼다.



헌강왕 말기, 동쪽의 주군을 순행할 때 어디에서 합류했는지 모를 네 사람이 어가를 따르며 춤을 추었다. 사람들은 네 사람의 춤꾼을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며 상서로운 일이라기보다는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해석했다.

▲ 포석정에서 뒤뜰로 이어지는 교량.
▲ 포석정에서 뒤뜰로 이어지는 교량.




◆헌강왕의 형제들

헌강왕은 아버지의 개혁정치를 본받아 과감하게 정치를 이끌어 가는 한편 형제들과의 우의를 돈독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시시때때로 왕권에 도전하는 귀족들의 세력들에 대비하는 방법을 유학을 통한 인재양성과 국학, 불교 등으로 귀족들 간에 힘의 균형을 맞추어 가는 기술을 다양하게 적용했다.



헌강왕은 화랑과 신흥귀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정책을 쓰면서 무엇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몸으로 실천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공부를 하거나 운동을 할 때도 동생들과 함께하는 시간으로 채웠다. 심지어 누이동생 김만도 무예를 수련하거나 사냥을 나가는 길에도 동행하게 했다.



헌강왕 김정이 태자 신분일 때 동생 김황과 여동생 김만을 불러 “우리 가문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왕권도 우리가 뭉쳐야 귀족들이 만만하게 보지 못한다”면서 수시로 다짐하듯 힘을 모으기를 주문했다.

▲ 헌강왕이 남해 나들이에 나섰을 때 용이 뱃길을 막아 운무를 드리웠다는 개운포 앞바다.
▲ 헌강왕이 남해 나들이에 나섰을 때 용이 뱃길을 막아 운무를 드리웠다는 개운포 앞바다.


특히 “내가 왕위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다면 다음은 황이, 그다음은 만이 네가 왕관을 물려받아야 한다”면서 “형제들의 우애에 금이 간다면 우리 가족은 물론 신라도 위태롭게 된다”며 형제들 간의 화합을 강조했다.



헌강왕은 두뇌가 명석하고, 무술에도 능했지만 성격은 불같이 급했다. 반면 동생 김황은 차분하면서도 무예에도 조예가 깊어 전쟁에 나가면 적군의 동태를 한눈에 파악하고, 유리한 정황을 만들어 승리하게 했다.



헌강왕 11년, 상주지방에서 진흥왕의 후손으로 자처하는 아자개가 지방세력들을 결집해 장군이라 지칭하며 봉기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김황이 형을 만류하고 스스로 군사들을 이끌고 전쟁터로 나아갔다.



김황의 군대는 처음부터 열악했다. 병사들의 수도 적었지만 상주까지 진군하면서 추위 때문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이 전쟁에서 김황은 뒤에서 날아오는 적의 창을 피하지 못하고 등에 큰 상처를 입고 후퇴했다.



김황은 형이 병을 얻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으며 50대 정강왕으로 즉위했지만 전쟁에서 얻은 상처가 병으로 도져 1년 만에 형을 따라 저승으로 가는 객이 되어버렸다.



정강왕은 죽음을 앞두고 “나의 누이 김만은 여성이지만 기골이 장대하여 장부와 다름없고, 기품이 총명하고 예리하여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에 못지않는 여왕이 될 수 있으니 왕으로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유지를 남겼다.

▲ 헌강왕릉과 정강왕릉을 잇는 산책로에 작은 목교가 설치되어 있다.
▲ 헌강왕릉과 정강왕릉을 잇는 산책로에 작은 목교가 설치되어 있다.


졸지에 두 명의 오빠를 잃어버린 김만은 야심차게 왕위를 이어받아 진성여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역량은 여느 군주들에 미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진성여왕은 상대등이었던 삼촌 위홍과 혼인을 하고, 모든 정치를 그에게 맡겼다.



그러나 상대등이었던 위홍도 진성여왕이 정치를 익히기도 전에 병을 얻어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좌절에 빠진 진성여왕은 사냥터에서 자주 만났던 화랑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정치를 맡기는 한편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진성여왕이 갈팡질팡하자 귀족들이 이 틈을 노려 왕권에 도전하면서 중앙정치는 급격하게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또한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가 강릉을 함락시키면서 후고구려를 세우고 신라를 위협했다. 후삼국시대가 열리면서 신라가 붕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자개의 아들 견훤은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고, 무주를 비롯한 동남쪽의 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해 신라는 멸망의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러한 상황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최치원이 시무10조를 작성해 올렸지만 귀족들의 농단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치원이 육두품 중심의 개혁안을 올려 유교중심의 정치로 왕권을 강화하려 했지만 진골귀족들의 세력에 의해 물거품이 되었다.



귀족들이 득세해 진성여왕을 몰아세우자, 진성여왕은, 김예겸이 헌강왕의 아들이라고 추천한 김요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신라 최초로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김요는 헌강왕이 사냥터에서 만난 여인이 낳은 아들로 판명되어 효공왕으로 즉위했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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