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의 후손으로 농사 짓다가 불의에 항거해 장군이 되어 병풍산성 쌓아, 백성 위해 고려에

▲ 아자개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삽을 버리고 창을 들고 쌓은 병풍산성.
▲ 아자개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삽을 버리고 창을 들고 쌓은 병풍산성.


아자개는 진흥왕의 후손으로 상주지방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항상 왕손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귀족 이상의 품위를 풍겼다. 당시 신라사회는 귀족들의 권력 다툼과 골품제로 타락하기 시작하고, 고구려 후손과 백제의 후손들이 옛영토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하면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 갔다.

아자개는 신라의 왕손으로 가만히 앉아 당할 수만은 없어 재산을 정리해 병사를 규합하고, 백성들의 평화로운 삶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고 전쟁에 직접 참여했다.

신라는 귀족들의 타락으로 갈수록 허약해지고, 침략전쟁에 도적떼들까지 극성을 부려 지방의 백성들은 처참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아자개도 스스로 장군이 되어 백성들을 지키려 했지만 재정적인 한계를 느껴 성품이 후덕한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해 상주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의탁했다. 아자개의 아들 견훤은 백제지방에서 신라의 장군으로 활약하다가 아버지의 뜻에 따르지 않고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 병풍산성의 고지에 일부 남은 토담산성의 흔적.
▲ 병풍산성의 고지에 일부 남은 토담산성의 흔적.


◆아자개의 가족들

신라 최고의 정복군주 진흥왕의 후손 아자개는 사벌주에서 아버지 각간 김작진과 어머니 왕교파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농부의 신분에서 신라의 맹장으로 활약한 아자개가 태어난 사벌주 고령군 가선현은 지금의 문경시 가은읍이다.



아자개는 본래의 이름이 김원선이었지만 이름을 숨기고 평범하게 농부로 살아야 했다. 왕손이면서도 각간으로 지방에 내려와 벼슬을 하다가 농부로 전환한 아버지의 엄한 분부 때문에 본래의 이름까지 숨기고 아자개로 지냈다.



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 부인이다. 농민의 딸 남원 부인은 두 번째로 맞은 아내다. 아자개와 상원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은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이다. 능애, 용개, 대주도금, 보개, 소개 등을 차례로 낳았다.





▲ 견훤산성의 동남쪽 치성.
▲ 견훤산성의 동남쪽 치성.


김작진은 고구려의 잔존세력들이 반란을 도모한다는 정보에 따라 사벌주의 현령으로 내려왔다가 농부의 딸 왕교파리를 아내로 맞아 아자개를 낳았다. 아자개를 낳은 작진은 아내의 요청에 따라 서라벌로 돌아가지 않고 사벌주에 주저 앉아 평범한 백성의 신분으로 삶을 이어가면서 농부로 전환했다.



그러나 김작진은 왕손에게 대대로 전해오며 익혀야 하는 학문과 왕가에만 은밀히 전수되어오는 무학을 익히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은 물론 아자개도 어린아이 때부터 학문과 무술 등 온갖 잡학들까지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 덕분에 아자개는 장군의 풍모를 갖춘 헌헌장부로 성장하며 일찍부터 주변의 눈길을 끌었다.



작진은 귀족들의 심각한 병폐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아들도 평범한 삶을 살아기를 원하며 농부로 키웠다. 그러나 건강하게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가전비기 정도는 익혀야 한다며 학문과 무학을 익히는데 온힘을 쏟게 했다.



자연스럽게 아자개의 아들 견훤 형제도 타고난 기골이 장대하고 영특해 학문은 물론 무술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여 여느 장군들보다 걸출하게 빼어난 실력들을 갖췄다. 아자개의 가족들은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실력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아자개가 병사들을 모으고 병풍산성을 쌓자 견훤이 상주지방에 쌓은 견훤산성.
▲ 아자개가 병사들을 모으고 병풍산성을 쌓자 견훤이 상주지방에 쌓은 견훤산성.




◆아자개의 전쟁

아자개는 태어나면서부터 신체가 훤칠하게 남달랐다. 한 번 보고 읽은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머리도 영특하고, 예의가 발라 이웃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며 자랐다.



아자개는 몸 속에서 뻗쳐오르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산으로 내달리며 심신수련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수련이 아자개를 더욱 성장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 농사를 지으면서도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



아자개는 몸 속에서 축적되는 힘을 느끼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과 당부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평범한 농부의 삶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타고난 털털한 성격과 온유한 성품으로 멀리 있는 청년들까지 그를 흠모해 교류하는 층이 두터웠다.



삶은 늘 원하는 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자개의 아비가 벼슬을 그만두고 농사에 전념하고 있었지만 상주를 다스리는 대신이 그를 시기해 사소한 일에도 늘 시비를 걸어왔다. 곳곳에서 고구려의 후손들과 어려운 살림살이에서 벗어나려던 농민들과 도적들의 봉기가 잦아지면서 아자개 가족들의 삶에도 큰 위기가 닥쳐왔다.



현령은 아자개의 아비가 농민봉기에 참여했다 죽은 친구의 가족들을 도와주었다는 명분을 들어 심하게 다그쳤다. 결국 김작진은 옥살이를 하면서 심한 고초를 당해 유명을 달리했다.

▲ 후백제를 세우고 스스로 멸망시킨 견훤의 능.
▲ 후백제를 세우고 스스로 멸망시킨 견훤의 능.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선량한 농민들의 핍박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아자개는 깊숙이 숲겨두었던 대도를 꺼내들고 병사들을 모아 성을 쌓고 살아남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다.



헌강왕 말기, 신라 하대의 혼란기를 틈타 전국 각지에서 농민을 포함한 지방세력이 봉기하자 아자개는 사불성에서 병사들을 모아 병풍처럼 성을 둘러쌓고 백성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신라왕손이라는 자존심을 걸고 스스로 신라의 장군이 되었다.



도적떼들을 막아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자개와 그의 아들 견훤 형제들이 타고난 무력으로 창과 칼을 무자비할 정도로 휘두르며 날뛰는 모습은 마치 범과 같아 도적들이 함부로 근접하지 못했다.



그러나 궁예의 세력을 흡수하고 후고구려를 고려라 개칭하고 일어난 왕건의 군대는 조직적이고 전투력이 강했다. 일반 사병으로 무장한 아자개 장군의 조직은 왕건과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 버거웠다.



아자개는 측근의 장수들과 회의를 열고, 백성들이 전쟁의 고통 없이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길은 왕건에게 항복하는 일이라 결정하고, 918년 7월에 마침내 고려에 항복했다.



이때 아자개의 아들 견훤은 동생들과 신라군을 병합해 백성들을 괴롭히는 무진주를 공격해 성을 빼앗고, 도적들을 물리치고 신라의 장군으로 활약했다.



견훤은 왕건에게 항복하라는 아버지의 제안을 듣지 않고, 완산주로 진격해 타락한 귀족들이 우글거리는 신라를 버리고, 후백제를 건국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 아자개의 이름을 빌려 생성된 문경 ‘아자개장터’.
▲ 아자개의 이름을 빌려 생성된 문경 ‘아자개장터’.




◆아자개의 고민과 견훤

아자개는 많은 고민에 휩싸였다. 아들 견훤 형제는 천둥벌거숭이처럼 힘만 믿고 날뛰며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다. 언제 위험한 적을 만나 목숨에 손상을 입을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리고 당장 북쪽에서 압박해오는 왕건의 군대가 걱정이었다. 왕건의 군대는 참모와 전쟁에 능한 장수들이 두텁게 포진해 있고, 병사들도 훈련이 잘되어 전쟁에서 흔들림없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왕건이 지휘하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적군들은 싸울 의지를 잃고 도망쳤다.



아자개는 개인적으로 힘과 지략이 있어도, 제대로 훈련을 받지못한 군사를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에는 한계를 느꼈다. 창과 칼, 활조차 잡아보지 못했던 대부분의 병사들이 가족을 지키겠다는 의지 하나로 뭉쳤지만 훈련된 군사들과 전쟁을 치르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전쟁을 하면 십중팔구는 지게 되는 필패의 형편이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하여 적군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도 아군의 힘이 워낙 열세여서 어떻게 겨뤄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 전주지역에 견훤이 쌓은 남고산성.
▲ 전주지역에 견훤이 쌓은 남고산성.


아자개는 밤이 깊어도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비명을 지르며 죽어나가는 친구와 아군 병사들의 모습이 아비규환으로 현실처럼 나타나 몸을 제대로 가눌 힘이 없을 정도로 수척해져 갔다.



아들에게 돌아오라고 전갈을 넣어도 견훤은 자신이 지켜야할 성과 백성들이 많아 돌아올 수 없다고 했다.



아자개는 백성들을 살릴 방법을 연구하고 고민했지만 피흘리지 않고 백성들이 편안해 질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아들과 손잡고 고려에 대항하는 것도 생각했지만 견훤이 도무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혼자 왕건과 싸울 수도 없고, 왕건에 항복하면 고려군이 되어 아들과 창칼을 맞대어야 하는 경우가 생길 판이었다.

▲ 문경 아자개장터에서 진행되고 있는 체험행사.
▲ 문경 아자개장터에서 진행되고 있는 체험행사.


아자개는 신라의 왕손이라는 체면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과 백성들의 평화로운 삶을 지켜야 한다는 명제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결국 아자개는 허울좋은 명분보다 실리를 택했다. 백성들의 평화로운 삶이 우선이라 판단하고, 왕건에게 항복했다.



당시 아자개가 왕건을 만나 담판을 지으면서 “나는 신라의 왕손이오. 지금 내 목을 벨 수는 있지만 우리 병풍성 백성들의 마음은 얻지 못할 것이오”라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대가 진정 백성을 아끼는 성군이고자 한다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사벌주 땅과 백성들을 얻을 것이오”라며 백성들의 목숨을 담보로 항복했다. 왕건도 아자개의 백성을 사랑하는 큰 마음에 감동하며 마주 절을 하고 뜻을 모아 백성들을 보살피기로 다짐했다.



아자개는 또 “이 땅의 백성들을 위해 항복을 했지만 나머지 신라의 땅과 백성들을 향해 칼은 들지 못하겠소”라며 전쟁을 포기하고 상주에 남았다. 훗날 아자개는 “나라 잃은 왕손은 명을 이어갈 수 없다”면서 조용히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견훤은 위기에 처했을 때 아버지 아자개가 왕건에게 항복했던 것을 상기하고, 자신도 왕건에게 의탁할 수 있는 용기를 내었다. 견훤은 왕건의 도움으로 자신이 세웠던 후백제를 자신의 손으로 무너뜨리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장군으로 남았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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