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강왕이 사냥터에서 만난 여인이 낳은 요, 진성여왕이 태자로 봉하고 왕위를 잇다

▲ 경주 배반동 마을 안길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 효공왕릉.
▲ 경주 배반동 마을 안길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 효공왕릉.


효공왕은 신라시대 52대 왕이다. 헌강왕이 사냥터에서 만난 여인과의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김예겸의 추천으로 진성여왕이 그를 태자로 책봉하여 왕위에 올랐다.



효공왕 재위 시기에는 궁예와 견훤이 신라의 서북과 서남쪽에서 압박해 들어오면서 위기를 맞고 있었다. 궁예의 신하 왕건이 해상권을 장악하고 활약하면서 중국과의 외교도 단절되었다.



국가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효공왕의 실정이 이어지자 대신들이 왕의 천첩(종이나 기생으로서 남의 첩이 된 여자)을 죽이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효공왕이 어린 나이로 즉위해 장인어른인 김예겸이 실질적인 국정을 장악했다. 이 때문에 효공왕은 나랏일보다는 자신의 여흥을 즐기는 일에 빠져 기울어져 가는 신라는 더욱 피폐해졌다.



효공왕이 죽자 왕의 장인 김예겸은 경휘를 자신의 의자로 삼아 신덕왕으로 즉위하게 해 왕의 아버지 신분으로 또다시 기울어가는 신라의 실력자로 군림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 효공왕릉의 봉분은 제법 규모를 갖추고 있지만 오랜 세월로 흘러내려 민묘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봉분 아랫부분에 호석이 불거져 있다.
▲ 효공왕릉의 봉분은 제법 규모를 갖추고 있지만 오랜 세월로 흘러내려 민묘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봉분 아랫부분에 호석이 불거져 있다.


◆효공왕의 출생

효공왕은 49대 헌강왕이 사냥터에서 만난 여인과의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나 왕궁 밖에서 자랐다. 진성여왕이 이를 전해 듣고 궁으로 불러들여 10세인 그를 태자로 봉했다. 요라는 이름으로 자란 태자는 12세 되던 897년에 진성여왕의 왕위 양여에 따라 효공왕으로 즉위했다.



헌강왕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기후가 몇 년이나 재해 없이 적절하게 비가 내리고 볕이 따뜻하여 풍년이 이어졌다. 정권도 별 무리가 없이 안정적이었다. 헌강왕은 이러한 때를 즐기며 사냥터로 자주 말을 몰았다.



왕은 어느 날, 고성숲에서 한창 사냥을 즐기다 황소만한 멧돼지를 발견하고 활을 쏘면서 뒤쫓게 되었다. 장군들의 화살도 멧돼지의 등과 목줄기를 파고들어 멧돼지는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멀리 도망했다. 돼지는 피를 흘리면서 도주하다 숲 끄트머리 돌담길을 돌아 초가집 마당으로 들어가 쓰러졌다.



왕이 멧돼지의 목에서 울컥울컥 쏟아지는 선혈을 받아오는 신하의 대롱을 받아 쭈욱 마시고는 입을 닦는데 문지방에서 사색이 되어 이런 장면을 지켜보던 처녀와 눈이 마주쳤다. 처녀의 얼굴은 달덩이처럼 눈부시게 하얗고 아름다웠다. 특히나 금방 눈물방울을 떨어뜨릴 것 같은 검은 눈동자를 담고 있는 눈은 왕의 눈을 부시게 했다. 수수하게 꾸미지 않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지만 처녀의 신체는 한눈에 보아도 팔등신이었다.



헌강왕은 주변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멧돼지가 마당으로 들어와 누웠으니 오늘 저녁은 이집에서 먹어야겠다”면서 처녀에게 요리를 하게 했다.

▲ 효공왕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고성숲으로 불리던 황성공원이다. 지금 황성공원은 소나무와 갈참나무 등의 숲으로 우거져 있고, 맥문동이 늦여름과 초가을까지 보라색 파도로 일렁인다.
▲ 효공왕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고성숲으로 불리던 황성공원이다. 지금 황성공원은 소나무와 갈참나무 등의 숲으로 우거져 있고, 맥문동이 늦여름과 초가을까지 보라색 파도로 일렁인다.


처녀는 급작스런 사고로 부모가 한꺼번에 죽어 열흘 전에 3년상을 치르고 혼자 삶을 꾸려가며 집을 지키고 있었다.



병사들과 궁중의 요리사들이 나서 처녀의 집에서 거나한 만찬연회가 열렸다. 얼떨결에 왕의 수라상을 만들게 된 처녀는 정신없이 그러나 차분하게 정성을 다해 상을 차리는 일에 가담했다. 특히 고기를 살짝 구워서 들기름에 튀겨 산나물과 무치는 요리는 직접 만들고, 아비가 아끼던 다래주도 반주로 올렸다.



헌강왕은 반주를 즐겨했는데 처음 맛보는 다래주에 한껏 취해 처녀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열흘이나 사냥터에서 잔치를 벌이며 처녀와 밤을 보냈다.



그러다 궁예가 서북쪽에서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압박해 온다는 첩보를 듣고는 서둘러 궁궐로 돌아갔다. 신기하게도 헌강왕은 그날 이후로 까마득하게 고성숲의 처녀를 잊어버리고 찾지 않았다.



처녀는, 아버지가 후손을 잇지 못해 늘 아쉬워하던 일을 생각하며 태기가 있자 왕손을 후손으로 낳아 키우리라 다짐하며 몸가짐을 조심했다. 그리고는 옥동자를 낳았다. 이름은 아주 높은 분의 아들, 아주 높게 될 아이라는 뜻으로 요(높을 요 嶢)라고 지었다. 아이는 영특하게 생겼다. 어릴 때부터 영민해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이해했다. 신체도 헌강왕의 뼈대를 닮아 곧고 바르게 성장했다.



처녀는 마을에서 아비 없는 아이라는 놀림을 받지 않도록 멀리 있는 서당으로 보내 글공부와 무예를 익히도록 했다. 요는 어머니의 정성어린 보살핌이 헛되지 않도록 잘 자랐다. 마을에서 누구나 한 번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훤칠한 아이로 성장했다.

▲ 효공왕릉 주변은 소나무숲으로 우거져 있다.
▲ 효공왕릉 주변은 소나무숲으로 우거져 있다.




◆효공왕의 즉위

요의 선행과 뛰어난 자질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궁궐의 김예겸 대신에게까지 전해졌다. 이판 김예겸은 내물왕의 후손으로 궁궐에서도 꽤나 높은 지위에 올라 최고의 권력에 대한 야욕을 품고 있던 몽상가였다.



헌강왕이 죽으면서 동생 황이 정강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얻은 상처로 병이 깊었던 정강왕은 즉위 1년 만에 죽으면서 여동생 만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오빠들에 이어 왕위를 이은 만은 신라 51대 진성여왕으로 즉위해 신라 세 번째 여왕이 되었다.



진성여왕은 왕좌에 오르면서 삼촌이었던 위홍과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으로 왕실의 권력은 위홍의 손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위홍이 죽음에 이르자 진성여왕은 삶에 대한 의욕은 물론 국정에 대해 흥미를 잃고 화랑들을 불러들여 주색에 빠져 나라는 크게 위기에 처했다.



이때를 틈타 김예겸이 헌강왕의 서자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고성숲마을로 사람을 보내어 김요를 불러왔다. 김요는 궁궐 밖에서 자랐지만 많은 공부를 통해 10세의 나이에도 이미 성숙한 어른들 이상으로 깊은 눈을 가진 인자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김예겸이 요를 전성여왕에게 소개했다. “요는 선왕께서 사냥하면서 만난 여인에게서 얻은 왕손입니다”라며 똘망하게 생긴 요의 등을 은근슬쩍 앞으로 밀어 보냈다.



진성여왕은 젊은 화랑들과의 쾌락에 빠져 나랏일에 흥미를 잃고 있던 터였고, 귀족들의 빗발치는 성화에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후사가 없었는데 오빠의 후손을 대하고 보니 한편 희망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여왕은 조용히 손을 들어 요를 앞으로 불렀다. 그리고 가만히 아이의 등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순간 눈에 반짝 총기가 이는가 싶더니 “이 아이는 분명 오빠의 자식이 맞아요”라며 “우리 가문의 후손들은 등뼈 두 대가 툭 불거지는 체형을 타고 태어납니다”면서 요의 등뼈가 튀어나온 것을 확인했다.



진성여왕은 바로 요를 태자로 봉하고, 여러 선생들을 요에게 붙여 왕손으로서의 수업을 빠르게 익히게 했다.



김예겸은 때를 같이해 진성여왕에게 자신의 여식을 추천하며 태자와의 결혼을 주선했다. 여왕은 예겸의 여식이 뛰어난 지혜를 가진 한편 현숙한 태를 가진터라 안심하고 요의 아내로 맞아들였다.



요가 12세에 이르렀을 때 진성여왕은 귀족들의 성화에 못이겨 요에게 왕좌를 물려주고 신라 최초로 스스로 왕관을 벗고 조용히 물러났다.



요는 고성숲 산속의 소년 신분에서 태자가 되었다가 신라 제52대 효공왕으로 즉위했다. 효공왕은 늘 가슴에 새겨왔던 어머니의 말씀대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성군이 되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요의 희망은 거기까지였다. 왕의 장인어른이 된 김예겸은 효공왕이 즉위하는 날부터 인사와 재정은 물론 병권까지 모두 손아귀에 넣고 국정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효공왕은 어린 나이에 궁궐의 실정을 잘 모르는 데다 장인어른이 나라의 실권을 모두 장악하고 휘두르자 아무런 할 일이 없어진 허수아비 왕이 되어버렸다.



효공왕은 12세에 왕위에 올라 27세까지 15년 간 재위하는 동안 군주로서 제대로 재능을 펼쳐보지 못했다.



장인 김예겸의 실정으로 귀족들의 세력 다툼에 휘말리고, 후반기에는 여자에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다. 대신들이 왕에게 나랏일을 보살펴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이미 효공왕은 총기를 잃고 듣지 않았다. 기어이 신하들이 왕의 애첩을 죽여 경고를 했지만 효공왕은 이미 갈 데까지 가버렸다. 자연스럽게 신라의 조정은 어지러워지고 국력이 약해졌다.



▲ 효공왕의 아버지 헌강왕릉 가는 길.
▲ 효공왕의 아버지 헌강왕릉 가는 길.


◆효공왕과 신덕왕

천년의 사직을 이어오던 통일신라가 본격적인 멸망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효공왕과 신덕왕 시대로 본다. 효공왕과 신덕왕은 모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제대로 왕노릇 한번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다.



효공왕이 12세에 왕위에 오르도록 지원하고, 그에게 딸을 시집보내 왕비로 간택하게 하며 실질적인 왕실의 실세로 떠올랐던 사람은 김예겸이다. 예겸은 진성여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으며 화랑들의 품에 안겨 실정을 쏟아내자 귀족들과 세력을 모아 몰아내기 위한 전략을 세워 추진했다.



예겸은 재빠르게 자신의 딸을 효공왕에게 추천해 왕비로 간택하게 했다. 이어 왕실에 자신의 세력을 깊숙하게 심어 화랑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산하고 있는 효종 등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기회를 노렸다.

▲ 효공왕의 아버지 헌강왕이 남산신의 춤을 따라 추었던 포석정.
▲ 효공왕의 아버지 헌강왕이 남산신의 춤을 따라 추었던 포석정.


900년을 전후해 견훤과 궁예가 서쪽과 북쪽에서 나라를 세워 후백제, 후고구려라 칭하며 스스로 왕이 되어 신라를 압박하는 후삼국시대가 열렸다. 효공왕이 왕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자 지방세력들은 하나 둘 후백제와 후고구려로 투항하며 살길을 찾아 떠났다.



이때 차기 왕으로 등극할 후보는 헌강왕의 사위들인 효종랑과 경휘가 유력했다. 효종은 화랑 출신으로 덕망이 높고, 무예 또한 뛰어났다. 거기에다 헌강왕의 맏사위로 경문왕가의 튼튼한 줄을 잡고 있었다. 경휘는 헌강왕의 둘째 사위로 아달라왕의 후손이었다. 역시 왕가의 후손이었지만 효종보다 명분으로 한겹 접어야 했다.



그러나 예겸은 경휘를 자신의 의자(義子)로 삼아 기회를 만들었다. 예겸은 전쟁이 산발적으로 신라 곳곳에서 일어나자 효종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나라를 구할 사람은 화랑도뿐이다”며 효종을 부추겨 전쟁의 선봉에 나서게 했다. 결국 효종은 대야성 전투에서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효공왕의 뒤를 이어 신라 53대 왕은 김예겸의 의자인 박경휘가 물려받았다. 후삼국시대에 멸망의 길을 걷는 기울어가는 신라의 왕실은 효공왕에 이어 신덕왕까지 예겸의 입김으로 움직였다. 효공왕은 예겸의 사위이고, 신덕왕은 예겸의 아들이었다. 불행하게도 예겸의 세상은 기울어가는 신라였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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