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의 자리를 박차고 승복을 입고, 진표율사의 뜻을 계승해 동화사를 짓다

▲ 심지 스님이 꿈에서 본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바위에 직접 새긴 동화사 봉황문 앞의 유희좌상으로 남아있는 마애여래좌상.
▲ 심지 스님이 꿈에서 본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바위에 직접 새긴 동화사 봉황문 앞의 유희좌상으로 남아있는 마애여래좌상.




팔공산 동화사를 중건한 스님으로 전하는 심지 스님은 신라 41대 헌덕왕의 아들이다. 심지는 아버지와 삼촌들이 4촌 형인 애장왕이 어리다는 이유로 섭정하면서 나라를 마음대로 운영하며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에 실망하여 궁궐을 떠나 구도의 길을 나섰다.



팔공산에서 공부하다가 속리산에서 진표 율사의 뼈로 만든 간자를 두고 법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지만 늦어 법당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마당에서 법문을 들었다. 율사의 간자가 돌아오는 심지 스님의 옷깃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 곱게 모시고 돌아와 동화사를 세웠다.



아버지와 형제들이 4촌 형 애장왕을 죽이고 왕관을 빼앗았다. 권력을 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권력과 온갖 힘의 무상함을 깨닫고 법복을 입은 채 세상을 등지고 진리를 구하는 일에 매진했던 심지와 같은 왕의 아들도 있었다.

▲ 동화사 당간지주.
▲ 동화사 당간지주.




◆헌덕왕의 가계

헌덕왕은 신라 41대 왕이다. 나중에 헌덕왕이 된 김언승은 조카 애장왕이 13세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상대등의 지위를 맡아 실질적인 권력의 주인이 되었다.



언승은 스스로 상대등의 자리에 올라 동생 수종, 충공 등과 함께 권력의 핵심이 되어 나라의 대소사를 관장했다. 그러나 애장왕이 나이가 들면서 의견대립이 잦아졌다.



헌덕왕은 동생 수종, 충공 등과 함께 사사건건 의견충돌을 벌이면서 견제하고 드는 조카 애장왕을 직접 칼로 베었다. 애장왕 청명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째, 나이 23세 되던 해였다. 언승은 막아서는 애장왕의 동생도 단칼에 베었다. 신라 최초의 혈족이 일으킨 왕 시해사건으로 기록됐다.



언승이 헌덕왕으로 즉위하고 동생 수종이 상대등에 올랐다. 다시 헌덕왕이 즉위 14년째에 이르러 아들들을 제쳐두고 동생 수종을 차기 왕으로 점지하고 부군이라는 직책을 주어 동궁에 머물게 했다. 이때 충공은 형 수종의 뒤를 이어 상대등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충공은 상대등의 지위에 있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데는 층층시하였다. 왕이었던 형 언승이 있고, 그 아래 차기 왕으로 지목된 전직 상대등 형 수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충공은 상대등으로 재위하면서도 상당한 갈등을 겪어야 했다.



삼촌들의 무자비할 정도로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권력행사는 어린 심지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특히 심지와 함께 어린 시절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공부도 하고, 놀이 친구가 되었던 사촌 애장왕 청명과 청명의 동생 장화의 삶의 변화는 심지에게 큰 충격이었다.

▲ 심지 스님이 속리산에서 진표 율사의 뼈로 된 간자를 두고 열린 법회에 참석했다가 간자를 가지고 돌아와 팔공산 꼭대기에서 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 동화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간자가 떨어진 곳으로 전하는 첨당의 우물.
▲ 심지 스님이 속리산에서 진표 율사의 뼈로 된 간자를 두고 열린 법회에 참석했다가 간자를 가지고 돌아와 팔공산 꼭대기에서 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 동화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간자가 떨어진 곳으로 전하는 첨당의 우물.




◆심지의 출가

심지는 4촌 형제였던 청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아주 가까이 살갑게 지냈다. 특히 청명의 누이 장화와는 어릴 때 소꿉놀이를 하면서 부부 흉내를 내어가며 가까이 지내는 사이였다. 자라면서도 장화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구해서 가져다주면서 마음속으로 애정을 키웠다.



그러던 어느날, 심지는 아버지와 삼촌들의 밀담을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아버지의 처소 앞을 지나는데 아버지와 삼촌들이 조카인 애장왕을 없애고 왕위를 빼앗자고 모의하는 이야기를 엿들어버렸던 것이다.



당시 심지의 아버지 언승은 상대등의 지위에 있으면서 재정과 병력을 비롯한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조카 애장왕의 왕권도 마음대로 휘둘렀다. 언승의 동생들인 수종과 충공도 형의 말에는 아무런 저항없이 잘 따르는 편이었다.



언승은 동생들과 함께 조카 애장왕을 제거하고, 먼저 언승이 왕위에 오른 다음 아들이 아닌 동생들에게 차례대로 왕위를 계승토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 동화사에 있는 심지나무로 전하는 오동나무.
▲ 동화사에 있는 심지나무로 전하는 오동나무.


심지는 친구처럼 지냈던 애장왕의 불행을 차마 지켜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특히 마음속 연인으로 짝사랑하던 장화의 불행은 더더욱 생각하기 싫었다. 장화 또한 심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은근히 심지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언승과 함께 실질적인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있었던 수종 삼촌이 장화의 미모를 탐하다 전격적으로 아내로 맞아들였다. 상대등이었던 언승이 추천하고, 오빠인 애장왕이 허락하면서 수종 삼촌과 장화가 혼인을 하게 된 것이다. 결혼식은 대대적으로 화려하게 대외사신들까지 초청해 나라의 잔치로 진행되었다.



장화가 삼촌의 손에 이끌려 내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속수무책 바라만 보던 심지는 세상 모든 인연을 끊고 싶었다. 심지는 권력에 대한 마음은 진작 포기하고 있었지만 장화에 대한 사랑까지 사라지자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



바깥 출입을 삼가고 내실에서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심지는 불문에 귀의하기로 마음먹었다. 승복을 입고 궁을 벗어나 훌훌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고 싶어졌다.



마음을 굳힌 심지는 아버지에게 아침 문안인사를 드리고, 나라를 돌아보며 백성들의 삶과 지역의 실정을 살펴보고 싶다고 아뢰어 허락을 얻었다. 그길로 심지는 거추장스런 일행들을 따돌리고 방랑길에 나섰다.

▲ 동화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봉서루. 봉황이 알을 낳는 형상으로 건축했다.
▲ 동화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봉서루. 봉황이 알을 낳는 형상으로 건축했다.


심지가 쉽게 자리를 펴고 쉴 수 있는 곳은 사찰이었다. 사찰은 모두 나라에서 주지를 임명해 운영하던 터였기에 실질적인 나라의 주인인 언승의 아들이라면 어떠한 사찰에서도 무사통과였다.



그러나 심지는 아버지의 이름을 팔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심지가 가는 곳마다 이미 그가 머물 공간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제공되곤 했다. 심지는 개의치 않고 고민하고, 먹고 자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곤 하는 여행을 이어갔다.



그러다 이상하게 진표 율사의 수행과 이론이 자꾸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불교의 법문이 귀에 익숙하게 자리하게 되면서 학문의 깊이가 깊었던 심지는 불법의 진리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었다.



허전하게 비었던 마음 속에 불법이 차곡차곡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면서 심지의 발걸음은 방방곡곡의 사찰을 누비며 진리를 탐구하는데 더욱 속도를 더했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복을 다시 마련해 입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진리를 구하던 심지는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나는 어디에서 비롯되어 어디로 가야하는지, 지금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파고들면서 팔공산 깊은 계곡에 똬리를 틀었다. 그의 고민은 끝없이 깊어졌고, 의문에 의문은 갈수록 더해져 열흘 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자듯 깊은 고민에 빠져들기가 일쑤였다.



심지는 수행에 전념하면 할수록 자신을 세상과 인연짓게 한 부처님의 모습이 간절히 그리워졌다.

▲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동화사 입구 별당 금당선원 입구 고목들 사이에 홀로 서 있는 부도탑. 부도탑은 바닥돌만 사각형이고 위의 부재들은 모두 팔각원당형의 기본틀을 갖추고 있다. 몸체를 덮고 있는 지붕돌도 팔각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보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동화사 입구 별당 금당선원 입구 고목들 사이에 홀로 서 있는 부도탑. 부도탑은 바닥돌만 사각형이고 위의 부재들은 모두 팔각원당형의 기본틀을 갖추고 있다. 몸체를 덮고 있는 지붕돌도 팔각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보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동화사 중창

심지가 팔공산에 든 지 3년이 넘어가면서 희미하게 부처님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제 눈을 감으면 부처님의 모습이 확연하게 그려질 듯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잠에 들었는데 부처님이 심지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꿈을 꾸었다. 벌떡 일어나 삼배를 드리는데 여전히 부처님은 인자한 미소를 띠고 편안하게 앉아 심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는 마음 속의 부처님을 잊지 않기 위해 꿈에서 보았던 부처님의 모습을 새기기로 했다. 심지는 손수 정을 들고 바위 앞에 서서 조각하기 시작했다. 암벽에 미소를 머금은 채 유희좌상을 한 부처님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심지는 정을 치는 망치질을 멈추지 않았다.



조각을 마무리하고 밤낮으로 엎드려 기도하며 수행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속리산 법주사에서 진표 율사가 계승한 부처님의 뼈로 된 간자를 두고 법회를 연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 보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는 동화사 대웅전.
▲ 보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는 동화사 대웅전.


심지는 솥에 밥을 지어 말린 다음 바리때(발우)에 넣고 속리산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처음 심지의 마음을 부처님 앞으로 이끌었던 말이 진표 율사의 법문이었다. 다시 그 진언을 듣고 싶어 속리산으로 바쁜 걸음을 옮겨가려 했다.



길은 험난했다. 겨우 찾아든 속리산에서는 영심 스님의 법회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심지는 본법회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마당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스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백일 간이나 이어지는 법회에 먹지도 않고 마당에 엎드려 기도를 올리는 심지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석 달째 접어드는 날에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붕과 산이 모두 하얗게 뒤덮여 천지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심지가 기도하는 곳 사방에는 눈발이 침범하지 않고 마른 땅으로 고요했다.



사람들이 그 신비스런 모습을 보고 심지를 법당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지만 심지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고, 조용히 물러나 아무도 보지 않는 방안에서 다시 기도를 올렸다. 오체투지하며 쉬지 않고 기도를 올리자 심지의 팔다리와 이마에서 피가 쏟아졌다. 이때 지장보살이 심지를 보살펴 그의 몸은 오히려 예전보다 말쑥하게 가벼워지고 청결해졌다.

▲ 동화사 동쪽의 봉황문.
▲ 동화사 동쪽의 봉황문.


심지가 기도를 드리던 수행법은 진표 율사가 득도하며 행했던 점찰법이다. 심지가 법회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소매에 간자가 붙어 있었다. 심지가 다시 돌아가 영심 스님에게 간자를 돌려주고 돌아오는데 또다시 간자가 소매에 달라 붙어 있는 것이었다.



심지가 다시 돌아가 간자를 돌려주려 했지만 영심 스님은 “부처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모시고 가서 잘 받드시게”라며 간자를 받지 않았다.



부처님의 간자를 얻어 팔공산으로 돌아온 심지는 동화사를 중건하고 수행에 매진했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백성들이 줄을 지어 동화사로 몰려와 심지 스님의 법문을 들으려 했다. 심지 스님의 흔적을 찾는 발길이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일지문이 닳도록 분주하게 드나들고 있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