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겸이 의붓아들로 삼아 박씨왕 신라 53대 신덕왕 즉위

▲ 경주 남산 삼릉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신덕왕릉.
▲ 경주 남산 삼릉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신덕왕릉.


신덕왕은 기울어져 가는 신라 말기에 김씨 왕가의 혈통에 종지부를 찍고 처음 신라를 열었던 박씨 왕가의 계보를 다시 잇는 주인공이 되었다.



신덕왕이 박씨 성으로 왕좌에 올랐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김예겸의 손에 의해 좌우되었다. 예겸이 신덕왕 경휘를 의붓아들로 삼고, 왕으로 추천해 즉위하게 하고 무력을 앞세워 정치를 마음대로 휘저었기 때문이다.



효공왕과 신덕왕은 모두 나이가 어리고 정치에 어두워 시중의 지위에 있었던 예겸이 실질적인 권한을 행세하며 섭정했다.



신덕왕 때는 신라의 힘도 크게 약해져 후백제 견훤과 후고구려로 출발하는 궁예, 왕건이 신라의 영토를 빼앗으며 위협적으로 세를 확산시켜 신라는 크게 위축되었다.



그나마 신덕왕은 경명왕과 경애왕으로 이어지는 아들들에게 왕위를 물려줘 박씨 왕조의 명맥을 잇게 했다. 경애왕 대에 이르러서는 견훤에게 왕궁까지 정복당해 왕은 죽음을 맞고, 신라는 패망의 길로 걸었다.



신덕왕이 박씨 왕손으로 대를 이었지만 아들들과 함께 천년 신라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는 불명예를 안은 불운의 주인공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 경주 남산 삼릉의 모습. 앞에서부터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으로 비정되고 있다.
▲ 경주 남산 삼릉의 모습. 앞에서부터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으로 비정되고 있다.




◆김예겸의 정치

진성여왕은 남편 위홍이 죽자 화랑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정치가 어지러워 지며 신라가 멸망의 길을 걷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진성여왕의 실정에 귀족들의 세력싸움이 극에 달하고, 지방에서는 도적떼와 반발세력들이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후고구려, 후백제의 궐기가 왕성하게 일어나 신라의 영토는 좁아지고, 백성들의 삶은 급격하게 궁핍해졌다.



이때 김예겸은 헌강왕의 서자 요를 사위로 맞아들이고, 진성여왕에게 요를 추천해 왕위에 오르게 했다. 김요는 12세에 효공왕으로 즉위했다. 예겸은 효공왕의 장인어른으로 나라의 살림을 맡아 휘두르는 실권자가 되었다.



나라 살림살이가 어지러운 상황이었고 귀족세력들이 이합집산하면서 서로 권력투쟁에 뛰어들어 나라의 체계가 무너졌다. 고을마다 도적떼들이 들끓여 후백제, 후고구려 세력에 합류하기도 하면서 신라를 공격하기에 이르러 신라의 영토는 처음 나라로 발전하던 시기의 영토 규모로 급속하게 좁혀들었다.

▲ 신라시대에 조성된 경주 남산의 불상.
▲ 신라시대에 조성된 경주 남산의 불상.


효공왕이 죽자 예겸은 헌강왕의 둘째 아들 경휘를 의붓아들로 삼고, 왕으로 추대해 신덕왕으로 즉위하게 했다. 헌강왕의 맏사위 효종랑은 무예가 뛰어나 화랑들로부터 깊은 신망을 얻고 있어 따르는 무리들이 많아 차기 왕위를 잇는 우선 순위에 있었다.



예겸은 효종랑을 후백제와 후고구려 세력이 침범해 전쟁이 그치지 않는 국경지대로 보냈다. 예겸은 “화랑은 이 나라의 대들보요 나라를 지키는 최고의 군대”라면서 효종랑을 전쟁터로 내몰아 전사하게 했다.



효종랑이 죽자 예겸은 헌강왕의 둘째사위였던 경휘를 적극 추천해 왕위를 잇게 했다. 경휘는 박씨 성으로 53대 신덕왕이 되었다.



예겸은 왕의 장인, 왕의 의부로 실질적인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해 나라의 살림살이는 날이 갈수록 궁핍하게 되었다.



▲ 삼릉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소나무숲.
▲ 삼릉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소나무숲.


◆신덕왕 즉위

신라 53대 신덕왕은 8대 아달라왕 후손으로 박씨에 이름은 경휘다. 912년 효공왕에 이어 즉위해 917년까지 5년 간 왕위에 있으면서 아들들이 경명왕, 경애왕으로 대를 잇게 했다. 신라의 문을 열었던 박씨 왕손들은 8대 아달라왕 이후로 석씨 왕손으로 왕권을 넘겨주고 뚝 끊기었다가 신라 말기에 이르러 다시 박씨 왕좌를 되찾았다.



신덕왕은 엄연히 박씨 성을 갖고 태어났지만 예겸의 눈에 들어 예겸이 의자(義子)로 삼아 사위 효공왕에 이어 왕위를 잇도록 후견인의 역할을 했다. 예겸은 진성여왕 당시 시중의 직책을 맡아 나라살림을 꾸리기 시작했던 대아찬으로 많은 무장을 거느려 귀족들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군사적으로 절대적인 힘의 우위를 과시해 왕을 추천하는 등의 일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신덕왕은 헌강왕의 둘째 사위로 맏사위이자 화랑이었던 효종에 비해 왕위를 차지하기에는 입지가 한참 밀렸다. 그러나 의부였던 예겸의 힘을 빌려 왕좌를 차지하는 덕을 누렸다.

▲ 삼릉 주변의 소나무숲 전경.
▲ 삼릉 주변의 소나무숲 전경.


신덕왕 때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지진과 때아닌 서리, 해일 등의 자연재난이 많이 발생하고,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침략도 잦아 나라 살림이 크게 흔들렸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신라의 존립이 위태로웠다.



916년 신덕왕 5년 가을 8월에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으나 신라가 후고구려의 힘을 빌려 대처해 겨우 성을 지켰다.



신덕왕은 후백제와 고려로 발전한 태봉의 세력에 침식되는 신라의 불운 속에서 917년 붕어하였다. 능은 경주시 배동에 있는 삼릉으로 1970년 비정하였으나 무덤의 구조 등으로 보아 현실성은 희박하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왕의 사후 시신은 화장되었고 뼈는 잠현의 남쪽에 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주시 남쪽 배동 배일산의 삼릉 중 규모가 가장 큰 가운데 원형봉토분이 신덕왕의 능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 고분은 산록에 위치하고 있고 내부 구조는 천장이 높은 횡혈식 석실분인 점, 그리고 분구의 규모와 호석의 축석 상태가 통일 전후 시기의 형식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학자들은 신덕왕릉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 경주 남산의 주봉인 금오봉 정상 표지석.
▲ 경주 남산의 주봉인 금오봉 정상 표지석.


◆박씨 왕손의 복귀

신라 천년의 시간을 왕으로 군림했던 사람들을 성씨별로 구분해보면 가장 먼저 신라 국가로 출범하면서 첫 시조가 되었던 박씨는 박혁거세와 남해왕 등 10명이다. 박혁거세에 이어 남해, 유리왕이 즉위했다가 8대 아달라왕 이후로 석씨들이 두 번째 신라의 왕손으로 대를 이었다. 석씨들은 석탈해왕을 비롯해 9대 벌휴왕 등 8명이 왕위에 올랐다.

세 번째 신라시대 왕손은 김씨로 최초의 미추왕과 본격적인 세습을 이루었던 내물왕 등 38명이다.

신라 992년 중 587년을 김씨들이 왕위를 이었다. 박씨들이 232년, 석씨들이 173년 신라를 다스렸다. 세계 어디에도 기록이 없는 천년의 왕조를 이은 신라이지만 멸망기에는 왕실과 귀족들의 부패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피폐했다.



처음 나라를 열었던 박혁거세의 대를 이은 8대 아달라왕의 후손으로 전하는 신덕왕은 728년 만에 다시 왕좌로 복귀해 기울어져가는 신라를 되살리려는 야심찬 포부를 가졌으나 의부 예겸에 세력에 눌려 뜻을 펴지 못했다.



경문왕으로부터 다시 부활한 신라의 화랑들은 귀족들의 세력다툼 틈바구니에서도 명맥을 유지해 신라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 경주 남산 곳곳에는 바위를 뚫고 우뚝 서 있는 바위솔이 있다.
▲ 경주 남산 곳곳에는 바위를 뚫고 우뚝 서 있는 바위솔이 있다.


효종랑과 함께 후백제, 후고구려와의 전투에 참여했다가 대거 죽음을 맞았던 화랑들 중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온 잔존세력들이 조금씩 규합해 다시 군사조직을 구성했다.



이들은 예겸의 견제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신덕왕이 예겸 모르게 후원해 극적으로 탄탄한 군대로 부활하기에 이르렀다. 화랑들은 예겸이 죽자 신덕왕의 휘하에서 최고 군사세력으로 다시 일어나 왕실을 호위하는 한편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후백제 견훤과 후고구려의 궁예와의 알력에서 승리한 왕건이 서로 다투면서 상대적으로 신라에 대한 공격이 느슨해진 틈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견훤과 왕건이 서로 밀고 밀리는 접전을 펼치며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는 동안 신라의 화랑들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신덕왕의 지원을 받아 내적인 성장을 도모했다.



신덕왕이 효종랑의 위세에 눌려 힘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효종랑의 죽음 이후 왕좌에 오르고, 예겸의 세력이 조금씩 위력을 잃어가는 틈을 이용해 화랑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적극 후원해 육성한 결과 늦게나마 힘을 얻었다.



그러나 견훤이 궁예와 다투면서 힘을 잃은 왕건을 몰아붙여 절대적인 우위에 서면서 다시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신덕왕이 겨우 화랑을 키워 군사조직으로 맞서보았지만 견훤의 지략과 용맹스런 장수들을 앞세운 후백제 군사력 앞에서는 맹수 앞의 양과 같았다.

▲ 경주 남산의 서쪽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삼릉계곡 입구에서 발견된 목없는 불상.
▲ 경주 남산의 서쪽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삼릉계곡 입구에서 발견된 목없는 불상.


신덕왕도 젊은 혈기로 화랑들을 앞세워 전쟁터에 직접 나섰지만 견훤의 군사들이 장거리 쇠뇌로 날린 화살에 맞아 즉위 5년만에 죽음을 맞았다. 신라의 부흥을 되살리려던 그의 꿈은 허무한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신덕왕에 이어 그의 아들 승영이 54대 경명왕으로 즉위해 7년 동안 다스렸지만 신라는 더욱 쇠약해지는 길을 걸었다. 경명왕의 동생 위응이 924년 54대 경애왕으로 즉위해 3년 만인 927년 견훤에게 목숨을 잃으면서 신라는 실질적으로 패망했다.



견훤이 신라를 정복하고, 김부를 신라의 마지막 56대 경순왕으로 세웠지만 경순왕은 견훤을 배제하고, 고려의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면서 천년 신라의 종지부를 찍었다.



박씨 왕조를 다시 열었던 신덕왕으로부터 시작된 신라의 패망기는 경순왕 대에서 기록이 끝났지만 고려시대에 기록한 역사는 신라의 멸망에 대한 책임을 경애왕에게 돌리고 있다. 경애왕이 위기에 빠진 나라 살림은 돌보지 않고 신하들과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가 견훤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기록했다. 반면 마지막 경순왕은 고려 왕건의 사위가 되어 신라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성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서들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의 이면을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학자들의 이야기에서 신덕왕과 경명왕, 경애왕에게로 겹쳐진 불명예 또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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