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왕의 현손 풍월주 효종, 뛰어난 인품으로 예겸의 간계로 전쟁터에서 죽다



▲ 효종랑이 화랑들을 위해 위로연을 베풀었던 경주 남산의 포석정.
▲ 효종랑이 화랑들을 위해 위로연을 베풀었던 경주 남산의 포석정.


신라의 화랑 ‘효종’은 문성왕의 현손이자 신라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 김부의 아버지다. 헌강왕의 맏사위로 신망이 두터웠던 효종은 효공왕에 이어 왕위를 물려받을 가장 적임자로 떠올랐지만 예겸의 전략에 말려 전쟁터로 나갔다가 허망한 죽음을 맞았다.



전쟁터에서 효종랑은 죽음을 맞았지만 견훤과의 인연으로 후일 아들 김부가 견훤에 의해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즉위하게 됐다.



왕의 사위로, 화랑의 우두머리로, 효녀 지은이의 남모른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왕손 효종도 전쟁터에서 허무한 죽음을 맞는 운명의 주인공이 되고말았다. 뛰어난 학식과 출중한 무예실력을 가지고 많은 화랑들이 따르는 인품까지 갖춘 훌륭한 인물이지만 정략적인 정치의 희생양이 되는 효종랑의 이야기가 바른 정치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한다.

▲ 효종랑과 화랑들이 어울렸던 포석정의 소나무숲.
▲ 효종랑과 화랑들이 어울렸던 포석정의 소나무숲.




◆화랑 효종

효종은 신라 46대 문성왕의 현손이다. 효종의 아버지는 김실홍이라고도 불린 각간 김인경이고, 할아버지 역시 각간과 시중을 지낸 민공이다. 증조부는 문성왕의 아들로 상대등을 지낸 김안이다.



효종의 아들은 견훤이 보은하는 의미에서 왕위에 앉게 한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남은 경순왕 김부이다. 효종은 아들이 경순왕으로 즉위한 뒤 신흥왕으로 추봉됐다. 경순왕의 아버지가 화랑의 검선 효종랑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엄연한 역사이다.



효종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무예에서도 뛰어난 자질을 보여 아버지가 일찍부터 유명한 스승을 초빙해 학문과 함께 무예를 닦도록 했다. 아버지는 효종이 곧잘 학문과 무예에서 성과를 보이자 화랑도에 입문하게 해 친구들을 사귀고 전국을 돌면서 풍류를 익히게 했다.



효종은 화랑이 되어 전국을 돌면서 친구를 사귀고, 학문과 무예를 익히는 한편 지리적 특징을 꼼꼼하게 파악해 지도로 그리면서 머리 속에 입력했다. 전쟁과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영토를 자세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공부했기 때문이다.

▲ 포석정의 뜰.
▲ 포석정의 뜰.


이러한 효종의 모범적인 태도와 그의 타고난 활달함과 빼어난 외모 등으로 그를 따르는 낭도들이 많았다. 효종은 아버지와 집안의 타고난 배경과 그의 뛰어난 성품 등으로 화랑에 입문한 지 3년 만에 우두머리 풍월주가 되었다.



낭도들이 효종을 따르는 가장 큰 이유는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검술의 실력이었다. 효종은 문무왕 이후 거의 실존되었던 신출귀몰한 검법을 우연한 인연으로 수련하게 되었다. 김유신 장군이 적군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던 그 비법의 검법이었다.



효종은 낭도들과 축국(현재의 축구)을 하거나 풍류를 읊을 때는 풍체 좋은 한량쯤으로 보기 딱 맞게 건들거리면서 스스럼없이 행동했지만 손에 검이 들리면 눈빛부터 달라진다. 누구라도 그의 검 앞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전쟁터에서는 그의 사방 열자 안으로 들어오는 적들의 목은 여지없이 추풍낙엽이 되었다.



이 때문에 겁이 많은 낭도들은 전쟁터에 나가면 효종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기도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 효종랑과 사랑을 나누었던 효녀 지은이가 살던 남간마을의 당간지주.
▲ 효종랑과 사랑을 나누었던 효녀 지은이가 살던 남간마을의 당간지주.




◆효종랑의 사랑

화랑 효종의 특출한 솜씨와 빼어난 인물됨은 궁궐에까지 알려져 헌강왕이 특별히 초대해 시험한 이후 사위로 삼았다. 왕의 맏사위가 되어 왕위를 이어받게 될 일순위의 후보자로 떠오르며 따르는 낭도들이 더욱 늘어났다.



효종은 왕의 사위가 되었지만 학문과 무예, 친구들과의 우정쌓기, 어지러워지는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정치 등에 관심을 두어 젊은이들 답지않게 사랑에는 그렇게 매달리지 않았다.



낭도로서 일과 우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효종에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전국을 유람하며 심신수련의 시간을 마치고 돌아와 포석정에서 낭도들을 위로하기 위한 피로연을 열었다. 그런데 위로연이 무르익어가려던 시점에 두 낭도가 뒤늦게 도착해 사연을 털어놓았다.



남간마을에 홀어머니를 봉양하는 서른에 가까운 나이 든 처녀가 있었다. 처녀는 이웃집의 일을 거들어주고 품삯으로 눈먼 노모를 봉양하는데 이삼년지간에 흉년이 들어 품을 팔기 어려워 부잣집 대감의 시중을 들어주고 쌀을 얻어 어미를 봉양하게 됐다. 이를 알게 된 어미와 딸 지은이가 서로 부둥켜 안고 우는 장면을 보고 그 사연을 듣고 오느라 늦었다는 것이다.

▲ 신라시대 왕궁 월성에서 포석정으로 가는 길목.
▲ 신라시대 왕궁 월성에서 포석정으로 가는 길목.


이를 딱하게 여긴 효종이 스스로 모아두었던 쌀 백석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자 낭도들이 십시일반 모은 쌀 백석을 또 가져다 주면서 지은이 모녀를 위로했다. 이러한 사연이 궁궐에까지 전해지자 진성여왕이 쌀 천석을 주고, 새로 집을 마련해 병사들이 이들을 보호하게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은이가 효종의 따뜻한 마음에 보답하고 싶다면서 낭도들의 도복 빨래와 잔심부름을 맡아하면서 효종과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자상한 효종이 지은이를 찾아와 어려움이 없는지 살펴보고 가곤 했다. 이때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련하고, 전장터를 오가면서 벌겋게 동상이 걸린 효종의 손을 보게 된 지은이가 가문에서 전해오던 비약을 처방해 효종의 동상을 치료했다.



지은이는 서른에 가까운 나이에 이른 노처녀였지만 타고난 신색이 워낙 달덩이 같았다. 마음이 편안하게 되면서 더욱 미모를 갖추게 되었다. 미모에다 아름다운 마음씨까지 가진 지은이에게 효종도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효종은 왕손으로 어버이를 두고 있어 신분의 차이가 많았던 지은이를 집안으로 들이지는 못하고, 여왕이 마련해준 지은이의 집에서 가끔 머물곤 하면서 남모르는 사랑을 키워갔다.

▲ 경주 남간마을에 남아 있는 신라시대 돌우물의 뚜껑.
▲ 경주 남간마을에 남아 있는 신라시대 돌우물의 뚜껑.




◆효종랑의 죽음

진성여왕은 오라버니 헌강왕이 사냥터에서 만난 여인이 낳았다는 조카를 궁으로 들여와 태자로 삼았다. 이어 예겸 등의 귀족들의 성화에 못이겨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헌강왕의 아들 김요에게 왕좌를 넘겼다.



예겸은 왕의 장인어른이 되어 실권을 휘두르면서 정권을 주물렀다. 어려서 어려운 살림살이에 찌들었던 효공왕은 즉위해서도 잦은 병치레를 하다 왕위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다.



이때 후계구도를 두고 고민하던 예겸은 왕위에 오를 일순위에 있었던 효종랑이 만만하지 않자 효종을 몰아낼 계략을 꾸몄다.



마침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신라와 가장 접경지역이었던 대야성을 공격해온다는 첩보가 접수되었다. 예겸은 풍월주 효종을 불러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소. 대야성으로 후백제가 공격해온다고 하니 화랑이 앞장서 막아주는 것이 좋을 듯하오”라고 했다.

▲ 신덕왕릉.
▲ 신덕왕릉.


효종은 “나라가 위험할 때 화랑이 앞장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라며 호기롭게 대답하고 낭도들을 소집했다. 이어 지은이에게 “어머니를 잘 보살피면서 건강 조심하고 계시오. 나라가 위태로우니 낭도들과 함께 다녀오겠소”라고 작별하고 대야성으로 말을 몰았다.



화랑도들이 대야성 입구까지 진격했을 때 이미 성은 견훤의 수중으로 떨어져버린 다음이었다. 효종은 밤이 이슥하기를 기다렸다가 낭도들을 네 팀으로 나누어 적군들이 승리에 도취해 술을 마시고 골아떨어지는 자시에 동서남북의 문루를 넘어 적장들을 급습하기로 했다.



효종의 지휘를 받은 소장들은 모두 전술과 무력이 뛰어났고, 낭도들도 많은 훈련으로 단련된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적장들도 모두 맹탕들은 아니어서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효종은 술에 취한 병사들을 다독이고 홀로 순찰을 도는 견훤의 넷째 아들 금강장군을 작전 끝에 생포했다. 금강은 견훤이 금강산에서 어려운 시기를 견디며 수련할 때 만나 도움을 받던 착한 부인이 낳은 가장 아끼는 아들이었다.

▲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효공왕릉.
▲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효공왕릉.


날이 밝고, 화랑세력과 신라의 현 병력으로는 대야성을 다시 탈취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분석한 효종은 포로가 된 화랑과 금강을 교환하기로 하고 견훤에게 사자를 보냈다.



견훤은 전시에 군령을 어기고 허술하게 근무한 병사들을 꾸짖고, 성루로 올라 효종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천둥같이 고함을 질렀다. “네놈이 죽고 싶어 제를 올리는 구나. 내아들 몸에 티끌만한 상처라도 생긴다면 네놈은 물론 신라에는 산사람이 없을 줄 알아라”고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듯하며 창을 높이 흔들었다.



효종은 “남의 땅을 빼앗고, 백성들을 유린하면서 무슨 낮으로 큰소리를 치는가”라며 큰 소리로 응수했다. 이어 “이미 당신이 대야성을 접수했으니, 우리 화랑들만 돌려보내준다면 당신의 아들은 상처없이 돌려보내주겠소”라고 했다.



적군들이 성문을 열고 손이 결박된 낭도들을 풀어주었다. 효종은 직접 손을 묶은 금강장군을 안내해 성문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갑작스럽게 금강과 효종을 향해 십여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효종은 들고 있던 칼로 날아드는 화살을 쳐냈다. 그러나 시간차를 두고 금강의 가슴팍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처낼 겨를이 없어 몸으로 막았다.



순간 갑옷을 뚫고 효종의 옆구리를 파고드는 화살의 감촉과 섬찟한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효종은 죽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태연하게 “이 무슨 작난이오. 나라를 다스린다는 장군이 할 일이오”라고 눈에 핏발을 세웠다.



견훤은 자신도 모르게 성문 아래서 화살을 날린 병사들을 향해 뛰어내리면서 순식간에 그들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는 효종을 향해 “미안하오. 내가 시킨 일은 절대 아니오”라고 포권을 취했다.



효종은 포로가 되었던 화랑들이 진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고, 견훤의 아들들이 넷째를 시기해 저지른 일이라는 것을 대뜸 알아차리고는 견훤의 앞까지 금강의 손을 잡고 나아가 직접 인계했다.



견훤도 효종의 상태를 눈치채고는 “당신에게 진 빚은 반드시 갚겠소”라며 포권한 자세로 크게 고개를 숙였다.



효종은 화랑들과 후퇴하며 돌아오는 길에서 숨을 거두었다.



견훤은 효종의 사내다움에 감복하여 후일 신라를 공격해 월성을 접수하고, 경애왕이 자결하게 한 다음 효종의 아들 김부를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추대하고 군대를 철수했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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