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명왕, 자정능력 잃고 후고구려에 의탁해 후백제 견제

▲ 경주 남산의 삼릉 가운데 가장 위쪽에 위치한 신라 54대 경명왕릉. 동쪽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모습.
▲ 경주 남산의 삼릉 가운데 가장 위쪽에 위치한 신라 54대 경명왕릉. 동쪽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모습.


신라 54대 경명왕은 신덕왕의 아들로 박씨 왕가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소개되는 신라 말기 비운의 왕이다. 경명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의 신라는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사방에서 압박해 이미 망국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후고구려를 일으킨 궁예와 그의 세력을 키우는 산실이 되었던 양길의 반란도 신라의 패망에 한몫 했다. 신라가 천년의 사직을 마무리하는 하반기를 이야기할 때 양길과 궁예를 빼고는 실마리를 맞추기가 어렵다.



경명왕은 나라를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 후백제와 후고구려, 어느 나라와 손을 잡고 나머지 나라를 견제해야 하는 약체국의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왕이 경산부를 지키는 장군에게 후고구려에 항복해 신라를 돕는 방패막이가 되도록 하는 웃지못할 전략을 쓰기에 이르렀다.

▲ 경명왕릉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모습. 삼릉 가운데 가장 위쪽에 위치해 있다.
▲ 경명왕릉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모습. 삼릉 가운데 가장 위쪽에 위치해 있다.




◆양길과 궁예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실정이 겹치고 재해가 잇달아 일어났다. 889년에 국고가 비게 되자 사자를 지방에 파견하여 세금을 독촉한 것을 계기로 전국에 초적(草賊)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지금의 상주)에서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뒤 도적의 무리들은 공공연하게 신라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한 세력 중 손꼽을 만한 자로 죽주(지금의 죽산)의 기훤과 북원(지금의 원주)의 양길이었다.



북원에 웅거한 양길의 세력은 궁예가 그의 부하로 활동할 정도로 큰 세력이었다. 궁예는 892년 견훤의 휘하에서 나와 양길에게 몸을 의탁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양길이 세력을 크게 떨치지는 못했다.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습격해 취한 뒤 스스로 왕이라 칭한 견훤이 양길에게 비장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는 견훤이 선전효과를 노린 것이지만 상대적으로 양길의 세력도 그렇게 강하지 못하였음을 설명해 준다.



그러다 궁예의 투항을 받고 난 뒤부터 양길의 세력은 점차 커졌다. 양길은 궁예를 우대하여 모든 일을 위임했다. 이어 군사를 나누어주어 동쪽으로 원정하게 하자 궁예는 군사를 거느리고 치악산 석남사로부터 주천(지금의 예천), 내성(영월), 울오(평창), 어진(울진) 등의 현을 습격했다. 894년에 명주(강릉)에 이르렀는데 그 무리가 3천500명에 이르렀다.

▲ 경주 남산의 삼릉 옆에서 나란히 서서 왕릉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는 오래된 소나무. 경배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 경주 남산의 삼릉 옆에서 나란히 서서 왕릉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는 오래된 소나무. 경배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뒤 양길은 사실상 강원도 일대에서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이어 궁예는 저족(인제), 생천(양구), 부약(춘천), 금성, 철원 등지를 점령하니 군세가 급격하게 불어나자 주변에서 항복해오는 무리가 많았다.



이때 점령한 지역들이 바로 양길의 세력권에 흡수되기보다는 궁예의 세력기반이 되었다. 이때부터 궁예는 무리가 많고 세력이 커지자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왕이라 칭할 만하다고 여겨 내외관직을 설정했다.



곧 궁예는 양길의 휘하에서 벗어나 독립세력을 구축했고 송악군(지금의 개성)으로부터 왕건의 투항을 받으면서 후삼국시대의 강력한 지배자로 등장했다.



이때 양길은 북원에 국원(충주) 등 30여 성을 가진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궁예의 영토가 넓어지고 인구가 많다는 말을 들은 양길은 그를 습격하려 하였으나 이 사실을 알아차린 궁예에게 오히려 습격 당해 크게 패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신라 하대가 되면서 지방호족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 지방호족은 중앙왕실의 권위를 인정하여 중앙정부와도 연결을 가지면서 독립된 세력기반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양길은 붕괴되어 가는 고대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경륜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그가 궁예로 하여금 철원 등의 지역을 병합하게 했지만 실제 이곳은 궁예의 세력기반이 되었고, 나중에 궁예는 이 지방에 웅거해 그에게 공공연한 적대행위를 자행하였다.

양길은 견훤 및 신라조정과 적대관계라는 부담을 안고 북방의 궁예와 패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제거되었다.

▲ 경주 서남산에서 삼릉으로 진입하는 입구. 삼릉은 신라의 아달라왕, 경명왕, 신덕왕의 능이다.
▲ 경주 서남산에서 삼릉으로 진입하는 입구. 삼릉은 신라의 아달라왕, 경명왕, 신덕왕의 능이다.




◆궁예

궁예의 아버지는 신라 제48대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궁녀로 전한다. 궁예는 어느 해 5월5일 외가에서 태어났다. 일관은 단오날에 태어나면서부터 이가 나고 이상한 빛까지 나타나므로 국가에 해로울 것이라고 했다. 왕이 이러한 말을 듣고 그 아이를 죽이라고 명했다.



사자가 그 집에 가서 강보에 싸인 아이를 빼앗아 다락 밑으로 던졌다. 이때 유모가 다락 밑에 숨어 아이를 받았으나, 잘못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건드려 궁예는 애꾸눈이 되었다.



경문왕은 이미 아들과 딸이 있었고, 새로운 아들의 출생으로 왕좌를 두고 세력다툼이 일어날 것이라는 일관의 말을 듣고 후궁에게서 태어난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궁예는 유모에 의해 키워졌다. 자라면서 세달사에 출가하여 선종이라 하였다. 후고구려 성립 당시의 신라왕실은 극도로 쇠약해져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대두했다. 거듭되는 흉년으로 국고가 탕진되어 889년(진성여왕 3년)에 과도하게 세금을 독촉하자 전국적으로 백성들이 반발하여 초적으로 변했다.



궁예는 이들을 14대로 편성해 자기 세력기반으로 삼고, 이들에 의해 장군으로 추대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양길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폈다.



901년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라고 했다. 그해 7월 청주인 1천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을 서울로 정했다. 상주 등 30여 현을 얻어 세력이 커지자 공주장군 홍기도 투항해왔다.



905년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긴 궁예는 연호인 무태를 성책으로 고치고 패서의 13진을 평정했다. 평양성주 금용도 이때 투항해왔다. 궁예는 세력이 강성해 짐을 믿고 신라를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신라를 멸도라 부르게 했다.



911년 연호를 다시 수덕만세라 고치고, 국호를 태봉이라 했다. 913년 연호를 다시 정개라 고쳤다.



그러나 궁예의 성격이 난폭하여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했다. 왕건을 주축으로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에 의해 918년 왕위에서 축출되어 변복차림으로 도망하다가 부양(지금의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피살당했다.



▲ 남서쪽에서 바라보는 삼릉.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면서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다.
▲ 남서쪽에서 바라보는 삼릉.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면서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다.


◆경명왕

신라 53대 신덕왕의 아들 박승영은 917년 54대 경명왕으로 즉위했다. 경명왕은 즉위하면서 동생 박위응을 상대등으로, 유렴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화랑세력보다 우위를 점하며 나라 살림살이의 주체세력으로 자리 잡기 위해 자신의 가족들을 주요관직에 포진하게 했다.



그러나 즉위 2년 일길찬 현승이 반란을 일으켜 어수선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후백제 견훤이 공격의 수위를 높여 대야성까지 함락되었다. 궁예의 후고구려도 한강 이남까지 밀고 내려와 신라의 영토는 결국 현재 경상도 정도의 영역으로 좁혀졌다.



신라는 진성여왕 당시 위홍의 정치에 이어 김예겸의 손에 의해 나라가 운영되면서 왕권은 사실상 실추되고 권위를 잃었다. 진성여왕이 효공왕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신덕왕이 왕좌에 오르기까지 왕위 선양도 모두 예겸을 비롯한 몇몇 대신들의 입김으로 진행되었다.



경명왕은 이렇게 추락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동생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실권 회복에 나섰지만 오히려 반란이 일어나고, 외세의 침략전쟁 등으로 나라는 저항의 힘을 잃고 멸망의 길로 치달았다.

▲ 삼릉 주변으로 소나무 고목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 삼릉 주변으로 소나무 고목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경명왕의 측근세력 위주 인사정책으로 왕실을 둘러싸고 있던 귀족세력들의 대다수는 자신의 고향을 찾아 지방으로 내려가 후백제나 고려에 투항해 신라의 국력은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왕건이 궁예를 죽이고 고려를 세우자 경명왕은 고려를 나라로 인정하고 사신을 보내 친화정책을 도모했다. 왕건도 고려에 친화적인 신라와 손을 잡고 후백제 견훤을 손쉽게 견제하는 후삼국 형태가 갖추어 졌다.



왕건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신라와 친화정책을 유지하는 동안 신라의 지방세력들은 앞다투어 고려에 투항했다. 경명왕 말년에는 당나라와의 외교도 시도를 했지만 성사되지는 못했다. 경명왕은 스스로 나라를 유지하는 힘을 잃고 고려에 의존하면서 경산부의 장군에게도 고려에 투항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후삼국의 형태에서 신라 왕실은 군사력을 키워 백성의 안위를 지키고, 나라의 영토를 확립하려는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경명왕은 즉위 초기 1~2년을 지나면서 귀족들과 대신들의 힘을 규합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놓여있었으나 경명왕은 오히려 매사냥에 나서는 취미활동을 즐기는 등으로 나라일을 돌보는데 태만했다.



경명왕 시대의 신라는 고려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학자들은 이를 경명왕의 정책 중에도 가장 큰 실정으로 평가하고 있다.

▲ 경애왕릉에서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릉으로 이어지는 길.
▲ 경애왕릉에서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릉으로 이어지는 길.


자연재해도 잇따라 일어났다. 당시 중국과 발해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체에 기온저하, 가뭄 등으로 기후가 변화하면서 자연재해로 독자적인 생산활동조차 기대하기 어려웠다. 왕실을 비롯한 왕경지역에서는 지방의 물자 유입이 필요했지만 지방세력들의 투항으로 이마저 어려웠다.



경명왕은 사면초가에 몰렸다. 군사력을 잃은 것은 오래되었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백성들의 민심 또한 흔들렸다. 신라가 스스로 지탱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경명왕은 견훤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다시 압박해오자 고려 왕건에게 아찬 김률을 사신으로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이때 왕건이 “신라에는 장육존상과 황룡사구층목탑, 진평왕옥대 등의 세 가지 보물이 있다고 들었는데 옥대는 지금도 있느냐”고 물었다. 김률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돌아와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황룡사의 노승만이 이를 알고 전해주었다.



경명왕은 옥대를 찾아 제사를 올리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재해와 외세의 침략이 이어지고 있지만 나라를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보물의 힘이라고 믿고, 비밀리에 보물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경명왕의 이러한 정치 형태는 경애왕으로 이어져 신라는 스스로 자구책을 구하기보다 종교적인 힘에 의존하는 정책으로 전락했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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