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왕 죽음으로 항전, 견훤이 효종랑의 아들 김부 경순왕으로 추대하고 돌아가

▲ 경주 서남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 55대 경애왕의 능.
▲ 경주 서남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 55대 경애왕의 능.




신라 55대 경애왕의 이름은 위응으로 경명왕의 동생이다. 형이 죽자 924년 즉위해 927년 견훤의 침략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3년 여의 기간 동안 신라를 다스렸다.



경애왕은 스스로 나라를 지킬 힘을 잃고, 고려에 의탁해 위축된 신라의 명맥을 겨우 이어가고 있었다. 경애왕은 화랑을 부활하고 청년 인재를 육성하는 정책을 펼치는 등 노력했지만 결국 후백제 견훤의 공격에 목숨을 잃었다.



포석정에서 견훤의 침략을 만나게 된 경애왕은 당시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후백제가 침략해 올 당시는 음력 11월 엄동설한이고 국운이 기울어가는 시점이라는 점 등을 들어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제를 올리고 있었다는 해석이 다수설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포석사라는 사당이 있었다는 주장과 함께 설득력을 얻고 있다.

▲ 경애왕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제를 올렸던 것으로 전하는 포석정.
▲ 경애왕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제를 올렸던 것으로 전하는 포석정.


◆삼국유사 속의 경애왕

제55대 경애왕이 즉위한 동광 2년은 갑신년 924년. 2월19일 황룡사에 백좌를 설치하고 경전을 읽었으며, 신승 300명을 대접했다. 대왕이 몸소 가서 향을 살라 정성을 바쳤다. 이 백좌가 선종과 교종이 함께한 처음 강좌라는 것이 기록으로 전한다.

927년 9월, 백제의 견훤이 신라에 쳐들어와 고을부(현재 영천)에 이르자 경애왕은 고려의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고려 태조는 날쌘 병사 1만 명을 보내주면서 돕게 했다.



그러나 고려의 구원병이 이르기 전 견훤은 11월 서울(경주)로 들이닥쳤다. 왕과 여러 부인, 그리고 종친들은 포석정에서 흐드러지게 놀고 있었다. 군사가 코앞에 이르렀는데도 눈치채지 못하다가 엄벙덤벙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과 부인들은 후궁으로 달아나다 적에게 잡혔다.

▲ 포석정 주변의 고목.
▲ 포석정 주변의 고목.


귀천을 따질 것 없이 모두 엎드려 노비로라도 살려주길 구걸했고, 견훤은 군사를 풀어 모든 재물을 약탈했다.



견훤은 왕궁으로 들어가 신하들에게 왕을 찾아내라 명하였다. 왕과 부인, 그리고 첩 여러 명이 후궁에 숨어 있다가 군사들에게 끌려나왔다. 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종용을 받아들였고, 왕비는 강제로 당했으며, 첩들은 부하들에게 수난을 입었다.



견훤은 왕의 동생 부를 왕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김부대왕은 적장 견훤에 의해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경애왕의 시신이 서당에 안치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통곡해 마지않았다. 고려 태조임금이 사신을 보내 조문했다.



다음해 무자년 928년 봄 3월, 고려 태조는 기병 50여 명을 데리고 서울 인근에 이르렀다. 경순왕은 뭇 신하와 함께 밖에까지 나와 영접을 하고 궁궐로 들어가 마주 대하는데 정성스럽게 예를 갖추어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 포석정 일대의 숲.
▲ 포석정 일대의 숲.




◆경애왕의 정책

경명왕이 즉위 7년 만에 죽자, 그의 아들들이 어려 상대등으로 나라일을 돌보고 있던 동생 위응이 경애왕으로 즉위했다. 경애왕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모색하기에 급급했다.



상대적으로 군사력이 약했던 신라는 후백제 견훤과 후고구려 궁예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경애왕은 경명왕과 같은 외교정책을 택했다. 막무가내로 신라 영토를 침략해오는 견훤을 견제하면서 궁예를 죽이고 고려를 세운 왕건과 친화전략을 펼쳤다.



그러나 왕건도 고려를 건국한 초기에는 북쪽 경계지역의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해 후백제 견훤의 악수를 받아들여야 했다.



경애왕은 안정적인 후삼국 구도를 지키기 위해 신라에 보다 친화적인 고려와 손을 잡는 전략을 택해야 했다. 지속적으로 공격해오는 후백제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택한 궁여지책이었다.



그런데 왕건이 견훤의 조카 진호를 볼모로 받아들이고, 후백제와도 화해정책을 펼치자 경애왕은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비밀리에 자객을 고려로 급파해 견훤의 조카 진호를 살해했다. 고려 군사세력에 살해된 것처럼 은근슬쩍 증거를 조작했다.

▲ 경애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진입로.
▲ 경애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진입로.


성격이 급한 견훤은 앞뒤 가릴 것 없이 고려를 원수로 간주하고 화친조약을 파기하고, 바로 고려와 전쟁을 선포하고 신라로 향하던 말머리의 상당한 전력을 고려쪽으로 돌렸다.



견훤은 “왕건이 내 조카 진호를 죽였다. 왕건이 나의 성의를 무시하고 후백제와 싸우자는 것이다. 내가 이를 앉아서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며 왕건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던 충청도지역의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경애왕의 대 고려 외교는 일단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고려와의 전쟁에 큰 이득을 내지 못하고 지루하게 장기전으로 접어들자 견훤은 공격의 창을 다시 신라로 돌렸다. 견훤의 군사가 고을부를 점령하고 다시 금성쪽으로 남하하는 속도를 높였다.



경애왕은 다급해져 왕건에게 도움을 청했다. 견훤의 신라에 대한 공격 속도는 너무 빨랐다. 왕건의 군사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견훤 군사는 경애왕이 신하들과 머물러 있던 포석정으로 몰려왔다. 경애왕은 왕비와 후궁들을 피난시키면서 자신도 정신없이 도망하는 신세가 됐다. 월성 안으로 들어서면 사천왕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신라 천년의 궁성 월성은 사천왕들이 각자 팔부중신들을 거느리고 사방을 지키고 있어 철옹성이었다. 어떠한 외부 침략도 월성을 무너뜨릴 수 없었던 것이 신라의 세 가지 보물과 함께 동서남북 4대 성문을 지키는 보이지 않는 전설적인 힘을 가진 사천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궁성은 천년동안 외세의 침입을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내부적인 다툼으로 왕좌가 바뀌는 경우는 있어도 외세의 힘에 의해 월성이 함락된 일은 없었다.



경애왕은 이러한 월성의 전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조건 월성까지만 들어가면 안전하다고 믿고 월성으로 기를 쓰고 도망길을 찾았다. 경애왕을 호위하던 무사들은 거세게 밀어닥치는 견훤의 군사들에게 맥없이 쓰러졌다. 목숨으로 퇴로를 열던 호위무사들은 경애왕의 길을 50보, 100보씩 거리를 확보하는데 그쳤다.



경애왕의 퇴로를 확보하는 마지막 길에는 후궁 비려의 칼이 있었다. 비려는 무가의 여식이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고려로 잠입해 견훤의 조카 진호의 목을 취한 자객 ‘무심’이 비려의 아비였다. 무심의 공을 높이 사 경애왕이 비려를 가까이에 두고 정을 주었던 것이다.



경애왕을 앞서 보내고 뒤를 지키려 검은 복면을 쓴 비려는 단도 수십여 개를 몸에 지니고 긴 칼을 양손에 들고 견훤의 군사들을 막아섰다. 그러나 물밀 듯이 밀어닥치는 거친 군사들의 힘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장렬한 비려의 죽음에 대한 보람도 없이 경애왕은 월정교를 넘지 못하고 견훤의 군사들에게 잡혀 치욕의 죽음을 맞았다.

▲ 포석정에 사당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건물터.
▲ 포석정에 사당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건물터.




◆경애왕의 최후

경애왕 시기에는 후백제와 고려가 사방에서 압박해 오면서 영토는 손바닥 크기로 줄어들었고, 백성들은 고향을 버리고 초적이 되거나 다른 나라로 귀속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경애왕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졌다. 형이 왕좌에 있을 때부터 상대등이라는 직위에서 나라의 살림을 총괄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애왕은 나라의 실정을 누구보다 훤히 꿰고 있었다.



경애왕은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명맥을 잇고자 다양한 정책을 구사하면서 청년인재를 육성하는 방안을 마련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미 청년들은 전쟁에서 죽거나 탈신라 추세에 힘입어 나라에는 청년들이 많지 않았다.



청년들을 모아 화랑을 부활하는 한편 궁여지책으로 청년여성들을 모집해 군사훈련을 시켜 궁궐을 지키게 했다. 여성들의 체형에 맞게 비도술과 낭창거리는 폭이 얇고 긴 검의 비법, 표창과 채찍 등의 특화된 무술을 연마하게 했다.

▲ 경애왕릉 바로 앞에는 소나무들이 경배하듯 능쪽으로 휘어져 있다.
▲ 경애왕릉 바로 앞에는 소나무들이 경배하듯 능쪽으로 휘어져 있다.


경애왕은 견훤이 서라벌에서 가까운 영천까지 내려와 진을 치고 있다는 보고서를 손에 들고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영천은 작은 고개 하나만 넘으면 바로 서라벌이다. 신라의 궁궐과 가장 연접해 있는 성이었다.



이 때문에 경애왕은 입술이 베이고 찬 바람이 입안으로 바로 들어오는 듯한 스산함을 피부로 느꼈다. 더이상 견훤에 맞서 싸울 장군도, 군사도 없었다. 다급해진 경애왕은 포석사에서 큰 재를 올리기로 했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나라의 운명을 신에게 빌어보기로 했다.



하늘도 야속했다. 포석정에서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견훤의 군사들이 밀어닥쳤다. 다급한 전령의 비보를 받아들기 바쁘게 적군의 말발굽소리가 우레같이 들려왔다. 궁녀들과 제군들에 휩싸여 경애왕은 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궁에 도달하기 바쁘게 비려가 적을 막아서다가 전사했다는 비보를 들었다. 경애왕은 비참했다. 신하의 여식이 나라를 위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 칼을 들고 저항했다. 부끄러워졌다. 경애왕은 견훤이 월정교를 넘어 의기양양하게 궁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전정으로 나아갔다.

▲ 경주 남산의 경애왕릉 입구 안내 표지석.
▲ 경주 남산의 경애왕릉 입구 안내 표지석.


경애왕은 견훤을 핏발선 눈으로 바라보면서 “내 부덕하여 백성들이 너희 군사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도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자리도 없다. 그러나 이대로 죽을 수 없다. 나를 베고 신라를 취하라”고 고함치며 칼을 빼들었다.



견훤이 지긋이 바라보다가 “백성들을 궁지로 몰아넣은 군주가 무슨 낯짝으로 왕을 운운하는가. 운이 다한 장군을 베는데는 좌장의 칼이면 충분하다”면서 왼쪽에 시립해 있던 넷째 아들 금강 장군에게 눈짓을 했다.



금강이 벼락같이 달려나가 엉거주춤한 경애왕의 칼을 쳐내고 등짝으로 묵직한 철퇴를 날려 고꾸라뜨렸다. 엎드려 피를 쏟는 경애왕을 돌아보며 금강이 견훤의 뒤로 와서 다시 시립했다.



견훤은 “나 또한 신라의 후손이다. 내 손으로 나라의 명줄을 끊을 수는 없다. 자질이 없는 왕은 자결하라. 그리고 신라는 맹장 효종랑의 후손 김부가 왕위를 이어갈 것이다”면서 경애왕에 이어 김부를 경순왕으로 봉하고 돌아갔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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