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진||수성구립용학도서관 관장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수성구 파동 출신인 계동 전경창 선생은 자신의 문집 계동집에 ‘선비의 공부방에는 책, 거문고, 활만 두라’는 교훈을 남겼다. 이 때문에 계동 선생에게는 불의에 항거하면서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활 든 선비’의 이미지가 형성됐다. 선생의 가르침에 힘입은 모당 손처눌 등 제자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공산 부인사에 본부를 둔 대구지역 의병부대인 공산의진군의 의병장을 차례로 맡았다.

신천 상류에 위치한 당시 수성현은 임진왜란 내내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팔조령을 넘어 북상하는 관문이자, 병참기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계동 선생의 수제자로 수성구 황금동 출신인 모당 선생이 지휘한 수성현 의병은 팔조령 등지에서 주로 매복전을 펼치면서 왜군의 진로를 저지하는 전투를 벌였다.

경산에서 대구 수성구로 편입된 고산지역에서도 의병활동은 왕성했다. 용학도서관이 ‘수성 선비를 만나다’란 제목으로 진행하는 도서관밖도서관 체험프로그램 중 올해 주목하는 내용이다. 대표적인 인물은 아들 3형제와 함께 순국한 박응성 의병장이다. 수성구 욱수동 출신으로 무관이었던 박 의병장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현재 두꺼비 산란지로 유명한 망월지 옆 자양산에 성을 쌓고 왜군와 전투를 벌여 여러 차례 승리했다. 이같은 전공 때문에 그는 ‘고산의 박 장군’으로 추앙을 받았다.

박 의병장이 쌓은 산성은 자양산성 또는 욱수산성으로 불렸다. 이 산성은 북쪽인 고산지역 일대는 물론, 서쪽인 수성구 만촌동 두리봉과 담티고개까지 육안으로 관측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또한 그는 경산 남천면 등지에서 여러 차례 왜군 수십명의 목을 베고, 말을 노획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뒤 성주 사원진으로 이동해 왜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세 아들 근, 장, 헌과 함께 전사했다. 뒷날 조정에서는 그에게 병조참의를 추증했다.

당시 의병장들은 목숨과 재산을 비롯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았다. 심지어 자식의 목숨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병들이 의병장을 따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박 의병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슬하에 4남2녀를 뒀던 그는 당시 열 살이었던 막내아들만 집에 남겨둔 채 아들 셋을 전장으로 이끌었고, 마침내 한 곳에서 4부자가 목숨을 잃었다. 오늘날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온갖 편법을 쓰는 기득권층의 행태와는 비교되는 모습이다.

박 의병장과 아들 3형제을 추념하는 비석은 수성구 시지동 솔일재 앞에 세워져 있다. 솔일재는 고산지역에 터를 잡은 밀양박씨 대사헌공파의 입향조인 박해 선생을 모시는 재실이다. 선생은 조선 초기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국정이 혼란스럽게 되자, 벼슬을 사양하고 청주에 은거하다가 처가인 옥산전씨의 터전으로 이주했다. ‘박응성 의병장 4부자 순국 기적비’가 솔일재 앞에 자리를 잡는 이유는 박 의병장이 박해 선생의 5대손이기 때문이다.

또 이 집안과 관련해 눈길을 끄는 이야기가 있다. 박 의병장 4부자 이외에도 박해 선생의 후손으로는 조선 중기의 무인이자 가사문학의 대가인 노계 박인로 선생과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무장독립단체인 광복회 총사령이었던 고헌 박상진 의사가 있다. 박해 선생의 17대손인 박상진 의사는 최근 대구근대역사관에서 막을 내린 특별전 ‘1910년대 광복을 꿈꾼 청년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박 의사는 노계 선생의 활동무대였던 영천을 세거지로 삼았던 박해 선생의 후손 중 일부가 조선 후기 울산으로 세거지를 옮긴 뒤 가세를 성장시킨 집안 출신이다. 왕산 허위 선생의 제자인 그는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를 결성한 뒤 대구경찰서 코앞에 자리한 상덕태상회를 거점으로 무장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에 체포돼 1921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김상진 (수성구립용학도서관 관장)



김광재 기자 kjk@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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