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랑의 아들 김부, 경순왕에 올라 고려에 항복해 천년 신라의 막 내리다

▲ 경기도 연천에 조성된 신라의 마지막왕 경순왕릉.
▲ 경기도 연천에 조성된 신라의 마지막왕 경순왕릉.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김효종의 아들로 이름은 김부이다. 효종랑은 진성여왕 당시 화랑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헌강왕의 사위로 문성왕의 현손이다.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완전히 정복하고도 후백제에 편입하지 않고, 효종랑의 아들 김부를 왕으로 추대하고 돌아간 일은 역사를 두고도 그 의미를 깊이 새겨볼 일이다.



경순왕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왕으로 추대해 준 견훤을 배제하고, 고려의 왕건과 손을 잡고 나라를 지키려 했지만 종국에는 고려에 항복했다.



경순왕이 고려와 싸우지 않고, 천년의 사직을 고스란히 헌납한 일을 두고, 겁쟁이라는 설과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 자존심도 돌보지 않은 성군이라는 평가가 겹쳐 나타나고 있다.



경순왕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에서 죽어 신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연천에 묻혔다.

▲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고 항복했던 동궁의 연못 월지 야경.
▲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고 항복했던 동궁의 연못 월지 야경.




◆인연

경순왕 김부는 아버지와 후백제 견훤의 특별한 인연으로 인해 927년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즉위했다.



견훤은 인연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은원관계는 확실하게 정리하는 분명한 성격을 가진 장군으로 유명하다. 그의 과격하고 활달하면서도 은혜와 원수를 철저하게 가리는 성격은 자신이 세운 나라 후백제를 자신의 손으로 멸망에 이르게 한 것으로 보아도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다.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고려와 신라를 상대로 좌충우돌하면서 전쟁을 일으켜 영토를 확보해나가던 당시 대야성 전투에서 신라의 명장 효종랑을 만났다. 당시 효종은 신라의 재상이자 화랑으로 전쟁의 앞장에서 범같이 내달렸다.



전투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을 당시 효종은 견훤을 상대로 말 위에서 “견훤 장군은 들으시오. 그대도 나라를 세운 군주라면 백성들이 피를 흘리는 모습을 좋아하지 않으리라 보오. 그러니 백성들인 병사들의 싸움은 그만두고, 그대와 내가 1대 1로 싸워 승패를 가립시다”라며 호기롭게 제안했다.



견훤도 1주일째 지루하게 전개되는 혈전에 서서히 지쳐가면서 짜증이 나던 판에 신라의 젊은 장수가 간단한 전쟁방법을 제안해오자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견훤은 “좋다. 신라에도 훌륭한 젊은 장수가 있구나”라며 “내가 직접 나서지. 일대 일 장군의 싸움에서 지는 쪽은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으로 하자”라며 큰소리로 응수했다.



견훤과 효종랑이 서로 갑옷과 투구를 고쳐 매고 긴 칼과 장창을 꼬나들고 말을 달려 부딪쳤다. 서로 맞닥뜨려 싸우길 수십합이 지나자 천하의 맹장으로 소문난 견훤도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효종랑 역시 아무리 젊은 장수지만 맹장을 만나 힘이 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둘이 맞부딪치면서 말에서 동시에 떨어졌다. 그러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로 일어나 서로를 향해 달려들어 육박전을 벌였다. 나이는 많았지만 노련한 견훤이 어깨를 내주는 척하다가 바람같이 오른쪽으로 돌면서 효종의 창을 쳐내면서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 신라 천년의 왕궁이 있었던 터 월성 발굴 장면.
▲ 신라 천년의 왕궁이 있었던 터 월성 발굴 장면.


견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넘어진 효종의 목에 대도를 살짝 올려놓았다. 고개를 숙이며 패배를 인정하는 효종을 견훤이 일으켜 세우고는 “젊은 장수가 대단하군. 신라의 인재로다”면서 목숨을 취하지 않았다.



효종은 “나는 패배한 장수이니 그대가 나를 베시오. 그러나 그대 또한 신라의 후인이니 백성들을 아끼시고, 나라를 패망에 이르게 하는 일은 삼가시기를 바라오”라고 부탁했다.



견훤은 기꺼이 수락하고, 효종을 돌려보내면서 “나는 인연을 중시하오. 신라를 패망에 이르게는 하지 않을 것이요. 그대와 같은 인물이라면 아름다운 인연을 맺을 수 있겠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얻은 상처로 효종은 후퇴해 돌아오는 길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견훤은 매우 안타까워 하며 충직스런 그의 가솔들은 반드시 챙기겠노라고 백제의 장군들 앞에서 다짐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견훤은 신라를 정복하고, 경애왕을 스스로 자결하게 했지만 효종랑의 아들 김부를 찾아 신라의 왕위를 잇게 해 약속을 지키고, 군사를 돌려 후백제로 돌아갔다. 김부는 경순왕으로 즉위하고 백성을 위해 모든 힘을 쏟으리라 다짐했다.

▲ 드라마 ‘대왕의 꿈’을 촬영했던 월성.
▲ 드라마 ‘대왕의 꿈’을 촬영했던 월성.




◆경순왕의 선택

신라는 BC 57년 육부촌장들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며 나라를 세워 천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서라벌을 도읍으로 삼아 삼국을 통일한 저력이 있는 나라다.



경순왕은 927년 뜻하지 않게 적장 견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경순왕 김부는 신라의 명장으로 알려지고 있는 김효종의 아들이다. 화랑 효종은 문성왕의 현손으로 헌강왕의 사위였다.



김부는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을 받아 어릴 때부터 총명하며 인자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덕망이 높아 주변으로부터 환심을 사며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아왔다.



왕좌에 오른 경순왕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 서라벌을 제외하고는 바로 연접한 영천, 경산까지 이미 적군의 영토로 빼앗겨버리고, 백성들의 마음도 신라를 떠나 고려나 후백제로 향하고 있었다.



후백제는 예전에 신라를 손아귀에 넣었다가 왕을 세우고는 돌아간 상태이고,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왕건 또한 후백제와 신라를 압박하며 영토를 점차 남쪽으로 넓혀오고 있었다.



신라는 언제 꺼질지 모를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결국 경순왕은 대신들을 불러 모으고 나라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중대한 결정을 하는 회의를 열었다. 935년 10월 동궁의 화려한 모습은 달빛을 받아 가을 바람에 일렁이는 월지 수면에 천연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 신라 천년의 왕궁이 있었던 터 월성 발굴 장면.
▲ 신라 천년의 왕궁이 있었던 터 월성 발굴 장면.


동궁에 모인 대신들은 조용하게 입을 다물고 경순왕의 이야기에 고개를 조아리기만 했다.



경순왕은 길게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여러번 반복하다가 굳은 얼굴로 “백제의 견훤은 성격이 흉폭하고 그 아들들 또한 그와 같다. 견훤은 아들들이 절에 가두고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어 앞날이 밝지 아니하다”고 설명했다. 경순왕은 잠시 뜸을 들이다 이어 “고려는 왕건이 나라를 세우고 백제와 전쟁을 벌이면서도 조금씩 영토를 넓히고 백성들을 자식 돌보듯하는 어버이 같은 분”이라 치켜세웠다. 경순왕은 또 “일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도 내가 항복의 의사를 내비쳤을 때 흔쾌하게 함께 나라를 경영하자면서 따뜻하게 내손을 잡고 형제와 같이 정을 나누면서 살아가자고 했다”고 말꼬리를 이었다.



경순왕은 국제정세에 대해서도 길게 설명한 뒤에 “전쟁은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몰아 결국 나라가 피폐하게 되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라며 “우리는 고려에 항복해 백성들의 안위를 지켜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부분 대신들은 엎드려 지당하다는 말씀이라며 받아들였지만 일부 대신들은 깜짝 놀랐지만 무어라 항변은 하지 못했다. 다른 대신들이 망설이고 있을 때 마의태자가 일어나 “아바마마, 우리 신라는 천년을 이어온 민족의 혼이 서린 나라입니다. 어찌 싸움 한 번 해보지 않고 나라를 바칩니까? 선조들을 볼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고 항변하며 전쟁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경순왕의 마음은 이미 굳게 정해져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마의태자 형제는 울면서 아버지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경순왕은 935년 11월 고려 태조 왕건을 동궁으로 초대하고 높은 자리에 앉도록 한 다음 단 아래로 내려가 엎드려 항복했다. 그렇게 천년의 신라는 막을 내렸다.

▲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어진.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어진.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민심

고려 태조 왕건은 경순왕의 항복에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삼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하는 기틀이 마련된 것이라 생각했다.



왕건은 바다에서 무역으로 세력을 키운 호족 출신이다. 그의 성격이 호탕하고 인품이 후덕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왕건은 상인 출신으로 누구보다 철저하게 실리를 따져 판단하고 평가했다. 어려운 일이라도 이익이 크다면 무리한 힘을 동원해서라도 취하고, 손해가 되는 일에는 교묘하게 핑계를 마련해 참여하지 않았다.



왕건은 항복해 오는 경순왕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왕과 대신들 3천여 명을 모두 개경으로 이사해 살게 했다. 그리고 서라벌은 경사스런 땅이라 하여 경주라 이름 짓고, 경순왕을 낭랑왕에 봉해 다스리게 했다.



또 왕건은 그의 맏딸 낙랑공주를 경순왕에게 시집보내 사위로 삼고, 고려인으로 살아가도록 했다.

▲ 월성의 동쪽 진입로.
▲ 월성의 동쪽 진입로.


경순왕은 고려의 정승이 되어 사심관으로 개경에서 살다 978년 4월 83세의 나이로 죽었다. 경순왕이 죽자 신라의 대신들이 고향에 장지를 마련하기 위해 시신을 경주로 운구할 때 방방곡곡에서 백성들이 경순왕의 장례에 참여하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천년 신라의 막을 내리면서 우리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신 성군이 돌아가셨다. 성군의 장례에는 반드시 참여해 추모해야 한다”면서 백성들의 발길이 삼삼오오 몰려들어 전국의 길과 계곡이 까마귀떼가 내려앉은 것 같았다.



이런 소문이 고려 왕실에 전해졌다. 고려 왕실에서는 자칫 신라의 백성들이 서라벌에 모여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골치아픈 일이 생기게 될까봐 비상이 걸렸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고려왕실에서는 긴급하게 “고려의 왕릉은 수도 개경에서 사방 100리 안에 설치해야 한다”면서 경순왕의 장례 운구를 경주로 내려가는 것을 막았다.



경순왕릉은 개경에서 100리 길인 경기도 연천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의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나 있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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