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부촌장들이 박혁거세를 추대해 나라 세움, 박·석·김 3성의 왕들이 나라를 다스림

▲ 신라 천년의 궁성으로 전해지고 있는 월성 야경.
▲ 신라 천년의 궁성으로 전해지고 있는 월성 야경.


신라 천년을 꾸려온 사람들 그 흔적을 찾아 2년 간 78회에 걸쳐 왕과 화랑, 승려, 학자, 예술인 등 100여 명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했다. 신라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신라 역사를 둘러보면서 새로운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2년에 걸쳐 만나보았던 100여 명의 신라인들의 이야기를 신라 건국기, 신라 중흥기 사람들,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들, 신라의 화랑, 신라의 승려, 신라 하반기 사람들 등 6회로 나누어 천년의 시간을 간추려 소개한다.



처음에는 신라의 왕을 추천해 나라를 세운 육부촌장과 신라의 고대국가적인 기틀을 마련한 박, 석, 김 3성 왕의 대표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신라 건국기 사람들의 삶을 스토리텔링해 기록한다.

▲ 신라 최초의 궁궐지로 알려지는 창림사지의 쌍귀부.
▲ 신라 최초의 궁궐지로 알려지는 창림사지의 쌍귀부.




◆육부촌장

신라가 고대국가로 성장하기 전에는 진한 땅으로 20여 부족이 곳곳에 부락을 형성해 서로 의존하거나 경쟁하는 구도를 보이며 살아가고 있었다.



부족국가의 형태를 보일 당시에도 마한과 변한 등의 이웃에서 침략해 오거나 왜구의 노략질이 빈번해 부족마다 생명보존과 식량 지키기 등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부족들은 대단위 조직체계로의 발전에 대해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여러 부족 중에서도 양산촌과 고허촌, 대수촌, 진지촌, 가리촌, 고야촌 등 여섯 부족의 세력이 비교적 강력했다. 대표적인 부족으로 자리잡고 있던 육부촌장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나라를 세우기로 합의하여 신라가 국가로 출발하게 됐다.



특히 알평 촌장이 다스리는 양산촌이 중심지역에 위치해 있으면서 풍부한 식량을 생산하며 안정적인 통치체제를 형성하고 있어 진한 지역의 리더 위치에 있었다.

▲ 신라 최초의 왕으로 61년 간 나라를 다스렸던 박혁거세 동상. 경주 황성공원에 있다.
▲ 신라 최초의 왕으로 61년 간 나라를 다스렸던 박혁거세 동상. 경주 황성공원에 있다.


알평 촌장은 촌장들의 회의를 소집해 연합세력 구성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강력한 국가체제로의 발전을 주도했다. 알평 촌장이 탄생한 광림대와 표암은 신라시대 사령지의 하나인 금강산에 위치해 있는 유서깊은 곳으로 전하고 있다.



알평 촌장은 육부촌장들과 힘을 모아 하나의 나라를 건설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결론을 이끌어내면서 강력한 지도력과 지혜를 가진 박혁거세를 초대 왕으로 추대해 서라벌 나라를 세웠다.



신라를 세운 육부촌장들은 모두 신으로 이 땅에 강림한 지도자들이다. 알천 양산촌 이알평 촌장은 금강산으로 강림해 남천을 중심으로 지금의 경주시내 지역에 형성된 마을 양산촌을 다스렸다. 양산촌은 나중에 급량부로 발전한 곳이다.



돌산 고허촌은 사량부로 발전한 최소벌도리촌장이 다스린 서남산과 내남면, 울주군의 두동면과 두서면 지역에 자리잡고 발전해 왔다. 무산 대수촌은 모량부로 불렸으며 손구례마촌장이 다스린 서천, 현곡, 건천, 서면 일대에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취산 진지촌은 본피부로 발전했는데 정지백호 촌장이 동남산, 외동읍 지역에 자리잡았다. 금산 가리촌은 한지부 배지타 촌장이 양남과 양북면, 감포읍 지역 일대, 명활산 고야촌은 설호진 촌장이 다스렸던 보문, 북천, 천북 일대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 박혁거세의 사당으로 들어가는 오릉 숭덕전의 입구 영숭문.
▲ 박혁거세의 사당으로 들어가는 오릉 숭덕전의 입구 영숭문.




◆박혁거세

신라 천년의 사직은 박혁거세왕을 시작으로 박씨 왕 10명, 석탈해왕을 비롯한 석씨 왕 8명, 미추왕을 시작으로 김씨 왕 38명 등 56명의 왕이 나라를 다스렸다.



신라 최초의 임금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나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죽음 또한 하늘로 올라갔다가 죽어 땅으로 몸만 떨어졌다는 신비로운 설화로 전해지고 있으며 관련 흔적들이 유적으로 남아 있어 단순한 신화나 전설로만 치부하기 어렵다.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나정은 경주 탑동에 흔적이 남아 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발굴한 결과 우물터와 팔각정의 거대한 건물터가 드러났으며 ‘나정’이라는 글이 새겨진 기와를 비롯해 1천3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박혁거세가 처음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렸던 궁궐은 창림사 절터에 위치했다고 전한다. 창림사지에서는 삼층석탑과 건물지, ‘창림’이라는 명문기와 등의 많은 유물이 나왔다.



박혁거세의 죽음을 전하는 설화와 같이 왕의 무덤은 다섯 기의 봉분으로 조성되어 오릉으로 불리는 사적으로 남아 있다. 오릉 옆에는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그 정신을 기려 사당의 이름을 ‘숭덕전’이라 이름 지었다.



박혁거세에 이어 그의 아들 남해왕, 유리왕이 차례로 신라의 왕으로 등극해 나라를 다스렸고, 5대 파사왕에 이어 지마왕, 일성왕, 아달라왕까지 이어지던 박씨 왕가는 석씨 왕손으로 왕위를 넘겼다. 다시 53대 신덕왕부터 55대까지 박씨가 왕위를 이어 10명의 왕을 배출했다.

▲ 경주 소금강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석씨 최초의 왕 석탈해왕릉.
▲ 경주 소금강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석씨 최초의 왕 석탈해왕릉.




◆석탈해왕

신라 4대 석탈해왕은 용성국에서 철기문화를 가지고 신라로 들어온 사람으로 남해왕의 사위가 되어 석씨로는 처음 왕좌에 올랐다. 석탈해왕은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죽어서 신이 되었다는 등 여러 설화의 주인공으로 전해지고 있다.



탈해는 청동기에 머물러 있던 진한 땅에 상륙해 앞선 철기문화를 보급하며 토착민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삶을 영위하며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우선 호공이 살고 있던 삶의 터전을 지혜로 빼앗아 자신의 주거지로 삼았다. 또 뛰어난 지략으로 남해왕의 눈에 들어 공주와 결혼하면서 신라 왕궁 깊숙이 파고들어 실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남해왕이 아들과 사위 누구든 덕이 있는 어른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유언을 남겼지만 석탈해는 처남이었던 유리왕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유리왕에 이어 62살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석탈해는 남해왕이 그러했듯 계림에서 얻은 김알지에게 왕위를 이을 것을 명했지만 알지는 왕좌에 오르지 않았다.

▲ 신라 4대 석탈해왕의 사당 숭신전.
▲ 신라 4대 석탈해왕의 사당 숭신전.


석탈해는 23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또 죽어서도 백성들을 지키는 동악의 신이 되었다. 후손들은 월성에 그를 모시는 사당을 지었지만 지금은 소금강산자락으로 옮겨 숭신전이라는 편액을 걸고 제사를 올리고 있다.



석탈해왕 시대까지만 해도 신라의 왕위를 잇는 권력 이양은 서로 양보하는 미덕을 보이며 순조로웠다. 남해왕이 궁중에서 중요한 일을 척척 처리하는 똑똑한 석탈해를 사위로 맞아들여 왕위를 잇게 하려 했지만 탈해는 처남인 유리왕에게 왕위를 양보했던 것처럼 말이다.



탈해왕은 또 계림에서 김알지를 얻어 현명한 그를 태자로 책봉하고 왕위를 이을 것을 희망했지만 알지 또한 유리왕의 둘째 아들인 파사왕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끝내 왕좌에는 오르지 않았다.



탈해왕은 용성국의 왕자로 신라에서 자리를 잡아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23년 동안 재위하면서 마한, 백제, 가야, 왜구 등의 침입을 받았지만 이겨내고, 나라 이름을 계림으로 바꾸어 안정적이며 평화롭게 운영했다.



특히 탈해왕의 백성 사랑은 남달라 죽은 이후에도 나라를 지키는 동악의 호국신이 됐다. 신라시대는 물론 고려, 조선시대까지 토함산에 석탈해왕의 사당을 지어 그를 추모하며 제사를 지내왔다.

▲ 김씨 최초의 왕이 되었던 대릉원의 미추왕릉.
▲ 김씨 최초의 왕이 되었던 대릉원의 미추왕릉.




◆미추왕

신라 13대 미추왕은 김알지의 7세손으로 이름은 미조 또는 미고, 미소라고도 한다. 김씨 최초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미추왕의 선대 김알지는 이름 그대로 지혜로울 뿐 아니라 마음이 너그러우며 체격도 크고 훌륭하게 자랐다. 석탈해왕은 죽으면서 김알지가 왕위를 잇도록 유지를 남겼다.



알지는 왕의 유지와 다르게 3대 유리왕의 아들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박씨와 석씨의 세력이 워낙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를 원만하게 경영하기 위해 박씨가 그대로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알지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 않았지만 5대 파사왕과 6대 지마왕의 왕비를 김씨 자녀로 간택하게 했다. 그로부터 왕궁에 김씨의 세력을 뿌리내릴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이다.



12대 첨해왕이 아들 없이 죽자 11대 조분왕의 사위였던 미추가 13대 왕으로 등극해 김씨로는 최초로 왕이 되었다. 이때부터 박씨와 석씨에 이어 김씨도 신라의 왕좌에 오르는 3성 구도가 형성되었다.

▲ 육부촌장 중 이알평공이 강림한 곳으로 전하는 소금강산의 광림대.
▲ 육부촌장 중 이알평공이 강림한 곳으로 전하는 소금강산의 광림대.


미추왕은 왕위에 오르자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왕권을 강화하는 방안을 다각적으로 마련했다. 가장 먼저 석씨와 박씨 성을 가진 대신들을 고르게 등용하고, 총명한 김씨 후손도 대신으로 골라 협의체를 구성했다.



특히 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력을 키웠다. 강력한 군대만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고,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은 훌륭한 군사를 양성해 외부의 적들이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중요 지역 경계마다 잘 훈련된 군사들을 배치하고, 과거에 신라를 침략해 빼앗아 갔던 백제의 땅을 공격해 되찾았다. 지속적으로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해 강한 군사 조직을 운영했다.



미추왕은 강한 왕실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내적 조직을 정비하고, 스스로 선봉장이 돼 백제를 향해 진군하는 군사들을 인솔했다. 백제와의 첫 전쟁에서 왕은 동서로 뛰어다니며 적의 군마를 무찔러 신라 병사들의 우상이 됐다.



미추왕은 22년의 재위기간 동안 수시로 변방까지 순찰하며 백성들의 어려움을 직접 살피며 필요한 지원 방안을 마련하는 실속 있는 정책을 펼쳐 백성들로부터 찬사를 듣는 성군이 되었다.



미추왕이 죽자 백성들은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이 슬퍼하며 가장 큰 봉분을 쌓아 대릉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한 달여 동안 상주로 세수도 하지 않으며 흰옷을 입고 갈아입지 않았다.



김씨의 시조로 전해지고 있는 김알지가 탄생한 계림에는 지금도 수령 100년을 넘긴 노거수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맥문동을 비롯한 다양한 화초들이 계절별로 공원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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