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의 주역 무열왕·김유신 장군·문무왕, 백제와 고구려 물리치고 당나라 군사까지 축출

▲ 경주 서악동 선도산 자락에 위치한 태종무열왕릉.
▲ 경주 서악동 선도산 자락에 위치한 태종무열왕릉.


삼국 중에서도 가장 약체로 분류되었던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신라 삼국통일의 뿌리에는 불교와 화랑정신이 있다고 분석한다. 그중 삼국통일을 이룩하는데 가장 앞장서 싸웠던 사람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 문무왕 등 삼인을 주역으로 꼽는다.



물론 이들과 손잡고 정치철학과 지도이념, 외교 등등의 분야에서 노력했던 숨은 일꾼들이 있다. 최고의 명문장가 강수, 외교와 전쟁에 나섰던 김인문, 원광과 자장, 원효, 의상, 명랑 등의 고승들의 공도 크다.



삼국통일을 위한 전쟁에 직접 참여하고, 통일을 이룬 주역들의 흔적을 경주 남산자락 통일전에 새겨두었다. 통일전의 벽과 사당에 전쟁사를 그림으로 그리고, 사적비를 세웠다. 그 인영을 모시고 있는 태종무열왕, 김유신 장군, 문무대왕의 활약을 소개한다.

▲ 문무대왕의 해중릉.
▲ 문무대왕의 해중릉.




◆김유신 장군

김유신은 가야의 후손이면서 신라의 왕손이다. 아버지는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손자이다. 유신의 할아버지는 김무력으로 대가야 정복 전쟁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친 신라의 충신으로 이름 올리고 있다.



또 김유신의 어머니는 만명 부인으로 아버지 서현과 어렵게 사랑을 이루어 유신을 잉태했다. 만명 부인의 아버지는 숙흘종, 할아버지는 진흥왕을 낳은 입종 갈문왕이다. 입종 갈문왕은 법흥왕의 동생이자 지증왕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김유신은 외척으로 보면 엄연한 신라의 왕손이다.



유신은 태어나면서 등에 북두칠성의 무늬가 새겨져 심상치 않은 인물이 될 것으로 많은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김유신은 출생에 대한 신비, 청년기 천관녀와의 사랑, 김춘추와 인연 맺기, 비담의 난 진압, 재매정 우물설화, 매소성전투사, 삼국통일의 길 등 수많은 이야기를 남긴 역사적 인물이다.



김유신은 화랑이 되면서 스스로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먼저 자신의 몸을 다듬어야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김유신의 수련은 혹독하리만치 가혹한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 흥무대왕으로 추증돼 왕에 버금가는 무덤으로 조성된 김유신 장군묘.
▲ 흥무대왕으로 추증돼 왕에 버금가는 무덤으로 조성된 김유신 장군묘.


결국 김유신은 단석산 석굴에 자신을 가두고 7주야를 기도하며 신인을 만나 세상의 이치와 전쟁에 대한 전술전략, 무기를 다루는 비법을 터득했다. 천신으로 태어난 기운을 회복해 전쟁터에서 전쟁의 신으로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



김유신의 군대는 강하게 조련되었다. 전쟁터에서는 한치의 물러남도 없이 적을 유린했다. 아무리 큰 전쟁을 치러도 김유신의 군사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유신의 군사철학이 철저하게 지켜졌기 때문이다.



훈련장에서 유신은 “전쟁에 나가서 죽지 않으려면 훈련에 열심히 임하라. 오늘 흘리는 땀 한 방울이 그대들의 목숨을 구해줄 것”이라며 다그쳐 낭도들을 강력한 전사로 만들어 어떠한 상황에서도 승리하는 강한 군대로 만들었다.



선덕여왕 13년 김유신이 상장군이 되어 성열성과 동화성 등의 일곱 성을 공격해 백제군을 크게 무찌르고 돌아왔다. 그러나 왕을 배알하고 승전보고를 올리는 자리에서 백제의 대군이 신라의 매리포성을 침공한다는 급보를 받았다. 선덕여왕이 유신의 공을 치하하면서 다시 출정을 명령하자 김유신은 가족도 만나보지 못한 채 바로 말머리를 돌려 전쟁터로 향했다.



이때 장군은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 앞을 지나면서 돌아보지도 않고, 부하에게 우리집에 가서 물 한 바가지를 떠오라 하여 그 물을 마시고는 “우리 집 물맛은 아직도 옛날 그대로구나”하고 그대로 전쟁터로 말을 몰아 승리하고 돌아왔다.



김유신은 염장이 반란을 일으켜 명활성에 주둔하며 나라를 위험에 빠뜨렸을 때도 기지를 발휘해 이를 진압했다.

▲ 문무왕이 회의와 연회를 개최하는 등의 목적으로 조성한 동궁과 월지의 복원된 야경.
▲ 문무왕이 회의와 연회를 개최하는 등의 목적으로 조성한 동궁과 월지의 복원된 야경.


또 진덕여왕 때 김유신이 압량주 군주로 있었는데 백제의 대군이 처들어오자 유신이 왕 앞으로 나아가 “백성들이 한 뜻이 되어 싸운다면 적의 숫자가 많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길 수 있습니다”라며 나아가 크게 이겼다.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당나라에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당 태종이 소정방에게 군사 13만을 주고, 김인문을 앞세워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치게 했다. 신라군은 백제의 왕도 사비성에서 7월10일에 만나 함께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백제의 계백장군이 황산벌에서 버티는 바람에 신라군사들이 7월20일에야 사비성에 합류했다.



소정방이 약속 날짜에 늦은 것을 나무라면서 신라의 부장을 참하려 했다. 이때 김유신이 나서 “우리는 백제를 치기 위해 사선을 넘어 여기까지 왔다. 만약 신라의 장수 목을 친다면 우리는 백제와 싸우기 전에 당나라와 먼저 자웅을 겨루겠다”면서 시퍼런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소정방은 부하장수들과 의견을 나눈 뒤 “좋다. 곤란한 사정이 있어 늦었다 하니 이번은 그냥 넘어가겠다. 백제를 공격하는 일에 황제의 군사와 함께 힘을 다해 싸워야 할 것”이라며 한 발 물러섰다.



이어 김유신의 군사는 당나라 군사들과 힘을 합쳐 사비성을 점령하고 백제를 무너뜨리고 합병했다. 이 전쟁에서 이기고 무열왕 김춘추는 윤충의 목을 베어 가슴에 맺힌 딸과 사위의 복수를 갚았다.



소정방의 군사는 다시 신라의 군사들과 손을 잡고 고구려 공격에 나서 668년 왕권싸움으로 내분이 일어난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그러나 당나라 군사들은 철수하지 않고 신라에 머물면서 백제와 고구려 땅에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해 당나라에 복속시키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김유신 장군은 문경을 거쳐 상주로 내려오는 당나라 소정방 군대를 맞아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를 위장해 당나라의 5만 대군을 독으로 몰살시켰다. 신라군사들은 쓰러진 당나라 병사들의 목을 모두 베었다. 당나라 군사들의 피가 내를 이뤘다. 신라는 비로소 완벽한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 김유신 장군이 군사들을 독려하며 보리로 술을 제조해 먹였다는 오봉산의 마당바위.
▲ 김유신 장군이 군사들을 독려하며 보리로 술을 제조해 먹였다는 오봉산의 마당바위.


◆태종 무열왕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신라 최초로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용수 또는 용춘으로 기록되고 있어 정확하게 아버지가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는 역사 속의 아이러니를 가진 인물이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가 김춘추에 대한 기록의 분량을 엄청나게 많이 할애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보다 김유신과의 관계, 당나라와의 문제, 문희 부인과의 혼인과정 등 간접적인 이야기를 소개하는 부분이 많다.



김춘추는 삼국을 통일한 3대 주역의 맨 앞자리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지금도 역사학자들은 ‘무열왕은 칼을 들고 전쟁에 앞장선 장수가 아닌 사람관계를 잘하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김춘추는 평생 두 가지의 한을 가슴에 간직해왔다. 첫 번째는 할아버지 진지왕이 화백회의에서 폐위된 수치, 그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백제군에 의해 가장 아끼던 딸과 사위를 잃은 데 대한 복수를 하는 일이었다.

▲ 태종무열왕의 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
▲ 태종무열왕의 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


결국 김춘추는 김유신과 단짝이 되어 화백회의를 거쳐 당당하게 왕위에 올라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고, 남자의 복수는 10년이라도 길지 않다는 말을 곱씹으며 당의 힘을 빌려 백제를 멸망시키고 딸의 원수를 갚고, 삼국통일의 토대를 마련했다.



무열왕은 풍채가 늠름하고 인물이 여성스럽지만 잘 생겼으며 영특하고, 어렸을 때부터 정치에 뜻을 두고 인물교류를 폭넓게 추진해 많은 인물들과 사귀면서 자신의 지지층을 두텁게 했다.



특히 춘추는 자신의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줄 무력과 덕을 가진 김유신과의 교분을 특별하게 두텁게 가지려 했다. 이때 김유신 또한 아버지가 가야 출신이라는 이유로 진골들의 푸대접을 받고 있던 터라 신라 진골과의 교분을 쌓아야 할 입장에 있어 김춘추와 뜻이 맞았다.



김유신은 김춘추와의 관계를 깊게 가져가기 위해 여동생들을 춘추의 배필로 맺어주려 했다. 이러한 김유신의 마음은 춘추의 뜻과도 상통하여 유신이 도모한 꾀가 이루어져 춘추와 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정략적으로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다.



김춘추는 딸과 사위가 대야성에서 백제군에게 목숨을 잃게 되자, 절치부심해 결국 당나라까지 건너가 군사를 빌려 백제를 멸하고, 복수를 이루며 삼국통일의 전초전을 마련했다.





◆문무왕

신라 30대왕 문무왕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법민이며 아버지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이다. 어머니는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인 문희 문명 부인이다. 왕비는 파진찬이었던 선품의 딸 자의 왕후다.



그는 어려서부터 외모가 출중하고 총명하였다. 태종무열왕 때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을 역임하였으며 얼마 뒤에 태자로 책봉된 후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듬해 태종무열왕이 미처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죽자 이에 법민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에게는 부왕이 미처 하지 못한 삼국통일의 과업이 남아 있었다. 문무왕은 668년 당나라와 협공으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의 군사들은 철수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신라를 공격하려는 낌새를 보였다. 왕은 외삼촌인 김유신과 함께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어 완벽한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 문무대왕의 해중릉을 바라볼 수 있는 감포지역에 세워진 신라문무대왕유조비.
▲ 문무대왕의 해중릉을 바라볼 수 있는 감포지역에 세워진 신라문무대왕유조비.


문무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전쟁의 소용돌이를 경험하며 백성들의 평화를 위해 전쟁을 종식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쟁한다며 칼을 높이 들고 전쟁터를 누볐다.



결국 삼국통일을 이룬 후에 무기를 묻었다. 이어 죽어서도 용이 되어 왜나라의 침략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겠노라며 바다에 묻혔다. 신라를 신라답게 만든 왕으로 평가되며, 백성을 사랑하고 아낀 진정한 성군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