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 시대 화랑 창설해 인재양성 기능 톡톡, 신문왕 시대 반란세력으로 와해, 경문왕 즉위

▲ 화랑마을 입구에 있는 화랑동상.
▲ 화랑마을 입구에 있는 화랑동상.
화랑은 불교와 함께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가장 큰 힘으로 작용했던 요인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화랑은 신라시대 인재육성을 위한 기관으로도 크게 기능했다.



화랑은 전쟁터에서 가장 앞에 나서는 돌격대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고, 화랑 출신이 성장해 장군이나 재상이 되거나 왕이 되기도 하여 인재 양성소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러나 진흥왕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조직이 활성화되었던 화랑은 신문왕 즉위 당시 화랑의 풍월주 출신인 김흠돌이 반란을 도모하다 숙청되면서 조직이 와해됐다. 이후 지방에서 면면히 이어져오던 화랑은 신라 하반기 경문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활성화되는 분위기를 보여준다.

▲ 화랑마을 전시실에 있는 화랑의 기마동상.
▲ 화랑마을 전시실에 있는 화랑의 기마동상.




◆화랑의 창설

김대문의 화랑세기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화랑에서 배출되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화랑에서 양성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화랑은 신라의 발전과 삼국통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위화랑이 법흥왕에 이어 진흥왕에게 화랑의 창설을 수차례 제안하고 건의해 왕실과 귀족들을 위한 사적인 무력집단에서 국가적 군사조직으로 발전했다.



화랑은 처음에는 원칙적으로 왕족이나 귀족들 자녀 중에서 선발되었다. 귀족이라 해도 진골정통이거나 혼인으로 대원신통이 된 가문에서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풍월주나 화랑은 세습이 되었고, 화랑은 출세가 보장된 신분으로 청소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 화랑마을 전시실에 있는 화랑들의 초상.
▲ 화랑마을 전시실에 있는 화랑들의 초상.


풍월주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3년이라는 임기를 채우고 물러났다. 물러난 풍월주는 상랑, 상선이라고 불리며 국왕에 버금가는 존경을 받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초기의 화랑은 국왕 직속의 군대 역할을 맡아 왕의 친위부대로 움직였다. 도성 수비, 왕궁 호“위까지 맡아 권력이 막강하게 커지면서 점차 나라의 군대조직으로 진화했다.



위화랑은 사조직이었던 화랑을 국가조직으로 창설하고 제1대 풍월주가 되었다. 그래서 화랑의 어버이로 불렸다. 심지어 일부학자들은 위화랑은 삼국통일을 이룬 천년왕국 신라의 선구자로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 화랑마을 전시실에 그려진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켰던 황산벌전투 장면.
▲ 화랑마을 전시실에 그려진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켰던 황산벌전투 장면.


◆화랑의 계보

신라 삼국통일에 큰 힘이 되었던 화랑은 법흥왕 때부터 시작해 진흥왕이 공식적인 국가적 기구로 발족했다.



화랑의 우두머리를 풍월주라고 한다. 풍월주는 제1대 위화랑으로부터 시작해 마지막 32대 신공까지 기록으로 전한다. 풍월주를 지낸 흠돌의 반란 이후 화랑의 군사적 기능이 약화되었다.



위화랑은 날이군 파로군주의 아들이자 소지왕의 후궁으로 들어왔던 벽화의 오라버니로 만 권의 책을 읽은 당시 찾아보기 힘든 학자이기도 하다.



위화랑에 이어 2대 미진부공이 풍월주에 올랐다. 미진부의 아버지는 아시공이며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삼엽궁주다. 3대 모랑은 진흥왕 당시 원화로 죽음을 당한 남모의 동생이다.



4대 풍월주 이화랑은 화랑의 창시자 위화랑의 아들로 피부가 옥같이 부드럽고 꽃 같이 아름다우며 음률과 문장을 잘했다. 진흥왕의 동생이자 후궁이었던 숙명궁주가 이화랑과 정을 통해 원광법사와 보리를 낳았다.

▲ 신라시대 화랑들이 훈련한 장소로 전해지는 경주 문복산.
▲ 신라시대 화랑들이 훈련한 장소로 전해지는 경주 문복산.


5대는 토함의 동생 사다함이다. 사다함은 진흥왕의 만류를 뿌리치고 관산성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 미실과 사랑을 나누었으나 끝을 맺지 못했다. 사다함은 죽음을 함께하기로 했던 벗 무관랑이 죽자 1주일 간이나 금식하며 슬퍼하다 따라 죽었다.



6대 풍월주는 진흥왕의 동생이자 미실의 남편으로 전하는 세종이다. 세종의 아버지는 태종으로도 불리는 이사부다. 진흥왕은 아버지가 다르지만 같은 어머니를 둔 세종을 동생이라 여기며 극진히 사랑하고 곁에 두었다.



7대 설화랑은 설원랑으로도 불렸다. 어머니는 금진낭주이다. 당시 화랑은 설원랑파와 문노파로 나뉘어 정통성을 따지며 대립했다. 설원랑은 미실의 정인으로 죽음에 이를 때까지 미실을 아끼고 사랑했다. 원효도 설원랑의 후손이다.



8대는 전설적인 인물로 화랑들의 우상으로 받들어지던 문노다. 문노의 어머니는 가야의 문화공주다. 문노는 사다함이 가야와의 전쟁에 나가기를 청했지만 어머니의 나라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을 하지않겠다고 사양해 의인으로 칭송받았다. 문노는 진지왕의 폐위에 깊이 관여했다. 미실이 그의 공을 인정하며 풍월주에 명했다.



9대 비보랑은 진흥왕의 사위로 검도에 자질이 뛰어나 무사의 기풍이 뛰어나 배우려는 낭도가 줄을 이었다. 10대는 친누나 미실의 정인이 되었던 미생랑이다. 미생랑은 진흥왕이 총애하여 곁에 두었다. 태자 동륜, 금륜과 함께 토함에게서 검을 배우고 만덕에게 춤을 배웠다. 미실이 사다함을 따르게 해 낭도가 되었다가 풍월주의 지위에 올랐다. 미생랑은 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해 신망이 두텁지 못했다. 처첩이 많아 아들이 백 명이나 되었다.



11대 하종 풍월주, 12대 보리공, 13대 진지왕의 아들 용춘공이다. 용춘은 화랑의 조직을 크게 확장하고, 신라의 군사력을 크게 키웠다. 14대 호림공에 이어 15대 풍월주가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이다.



16대 보종공, 17대 염장공은 비담과 함께 진덕여왕에 반란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18대 춘추공이 뒤를 이었는데 춘추공은 화랑의 힘을 빌려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이 되었고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19대 풍월주는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 20대 예원공, 21대 선품공, 22대 양도공, 23대 군관공, 24대 천광공, 25대 춘장공이다.



26대 진공에 이어 27대 흠돌 풍월주는 문무왕 때 벼슬이 높아지면서 세력을 키우고 신문왕 때 반란을 일으키다 진압되면서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신문왕은 화랑이 실질적으로 폐지에 이를 정도로 무력화 했다.



28대 오기공, 29대 원선공, 30대 천관, 31대 흠언에 이어 32대 신공에 와서 풍월주의 대가 기록으로는 끊어졌다.



그러나 이후 48대 경문왕이 화랑 출신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화랑은 면면히 맥을 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건설해 화랑들의 훈련장소로도 활용했던 동궁과 월지.
▲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건설해 화랑들의 훈련장소로도 활용했던 동궁과 월지.




◆화랑의 후예

화랑은 신라를 지탱하는 실질적인 힘이 되었으며 화랑 출신이 김유신과 김흠돌 등과 같은 장군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았을 뿐 아니라 태종무열왕, 경문왕과 같이 왕이 되기도 했다.



삼국통일을 이룬 전초전 황산벌전투에서는 반굴과 관창과 같은 죽음으로 전쟁의 기세를 바꾸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화랑 반굴은 백제와의 전투에 상장군으로 나섰던 김유신과 나란히 말머리를 같이 했던 흠춘의 아들이고, 관창은 품일장군의 아들이었다.



-진흥왕의 동생, 미실의 남편 세종: 신라 화랑들의 우두머리 제6대 풍월주 세종은 진흥왕의 동생이자 신라 최고의 색공지신으로 불리는 미실의 남편이다. 평생 미실을 사랑하고 그의 말을 잘 따랐다. 세종은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뛰어난 무술솜씨를 갖추어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운 장군이기도 하다. 세종의 아버지는 신라장군 이사부이고, 어머니는 진흥왕을 낳은 지소부인이다. 진흥왕과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는 다른 형제이다.



-죽지랑: 죽지랑은 신라시대 화랑 출신으로 장군이 되어 백제와의 전쟁, 당나라와 연합해 싸운 고구려와의 전쟁 등에서 크게 공을 세운 대신이다. 진덕여왕대부터 태종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대까지 재상을 지낸 역사적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가야와의 전투에 나섰던 사다함: 사다함은 신라시대에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화랑의 표상이다. 충과 효에 대한 뜻을 전달하고, 젊은이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화랑으로 추대되어 1천 명의 낭도를 거느렸다. 562년 진흥왕 23년 9월 이사부가 대가야를 정벌할 때 15세의 어린 나이로 종군을 신청해 귀당비장으로 출정했다. 5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국경선에 있는 적군의 성문 전단랑을 기습해 대가야를 멸망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 헌강왕의 사위로 화랑들의 우상으로 떠받들어지던 효종랑이 화랑들과 함께했던 포석정.
▲ 헌강왕의 사위로 화랑들의 우상으로 떠받들어지던 효종랑이 화랑들과 함께했던 포석정.


사다함은 이 전쟁에 나서기 전 미실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사이였지만 전쟁에서 돌아오자 미실이 궁으로 들어가 다시 세종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실의에 빠진 사다함은 어려서부터 함께 죽기를 맹세하던 벗 무관랑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7일간 슬퍼하며 통곡하다가 17세의 나이로 죽었다.



-화랑의 신 문노: 문노는 가야 출신이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귀족사회에서 따돌림을 받았지만 격검에서 걸출한 실력을 인정받으며 화랑의 풍월주 지위에까지 올랐다. 화랑의 신이라 불리며 대내외에 문노의 실력이 소문나자 미실과 세종에 의해 풍월주 지위에 올랐으며, 왕실의 여인과 혼인을 하면서 벼슬길에 올라 명실상부한 신라의 재상이 되었다. 문노는 공자의 말씀을 실천하는 그런 군자와 같은 언행으로 화랑들은 물론 신라 귀족과 왕실에서조차 최고의 대접을 받으면서 후일까지 화랑의 신이라 불리었다.



-경순왕 김부의 아버지 효종랑: 신라의 화랑 효종은 문성왕의 현손이자 신라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 김부의 아버지다. 헌강왕의 맏사위로 신망이 두터웠던 효종은 효공왕에 이어 왕위를 물려받을 가장 적임자로 떠올랐지만 예겸의 전략에 말려 전쟁터로 나갔다가 허망한 죽음을 맞았다.



전쟁터에서 효종랑은 죽음을 맞았지만 견훤과의 인연으로 후일 아들 김부가 견훤에 의해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즉위하게 됐다.



왕의 사위로, 화랑의 우두머리로, 효녀 지은이의 남모를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왕손 효종도 전쟁터에서 허무한 죽음을 맞는 운명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김응렴 왕이 되다: 낭염 화상이 낭도들을 인솔해 3년이나 수련하면서 응렴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월성으로 돌아와 헌안왕에게 응렴을 추천했다. 헌안왕은 응렴을 사위로 삼고 후일 왕위를 물려주어 화랑 응렴은 경문왕이 되었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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