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 이후 왕권다툼으로 급격하게 기울어, 경순왕 고려에 항복하며 천년 신라 막내려

▲ 원성왕릉을 지키는 서역인상.
▲ 원성왕릉을 지키는 서역인상.




신라 하반기는 원성왕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원성왕은 실력으로 왕좌에 올라 독서삼품과 등의 제도개혁을 추진하면서 나라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지만 크게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원성왕 이후 치열한 왕권다툼과 함께 신라는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는 가운데 치열한 왕권다툼이 전개되었지만 원성왕 이후 신라의 마직막 왕인 경순왕까지 모두가 그의 직간접적인 후손들이다.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헌덕왕과 흥덕왕, 그리고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으로 이어지는 피 튀기는 오욕의 역사 가운데 장보고, 효종랑, 경문왕, 최치원 등의 걸출한 인물들이 나왔지만 패망의 길은 막지 못했다.



신라가 견훤에게 치욕적인 패전을 당하고, 왕으로 추대된 경순왕은 고려에 고스란히 천년의 사직을 헌납했다. 천년이 지난 지금 경순왕은 오히려 성군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기울어가는 신라 하반기 사람들의 모습을 개괄적으로 들여다본다.

▲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헌덕왕의 능에 유일하게 꽃을 든 신상의 호석.
▲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헌덕왕의 능에 유일하게 꽃을 든 신상의 호석.




◆원성왕

신라 천 년의 역사는 한결같지 않다. 신라시대를 통틀어 상반기, 발전 성장기, 하반기라는 세 단계로 분류한다면 원성왕대는 혜공왕으로부터 기울기 시작한 신라의 멸망을 향한 하반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시기다.



혜공왕 시대 원성왕 김경신은 37대 선덕왕이 된 김양상과 손잡고 김지정의 난을 진압했다.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 혜공왕을 살해하고 내물왕계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했다. 선덕왕은 내물왕의 11대손이다.



선덕왕이 즉위하고 김경신은 상대등이 되어 실질적인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며 왕좌에 오르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선덕왕이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어 조카 김주원에게 이양할 계획이었지만 내물왕 12대손 김경신은 선덕왕이 죽자 김주원에 앞서 왕좌에 올라 38대 원성왕이 됐다. 원성왕은 785년부터 798년까지 13년 간 왕좌에 앉아 있었다.



원성왕은 자신의 왕위 이양을 정당화 하기 위해 신라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만파식적을 아버지로부터 받았다는 것과 삼룡귀정설 등의 신화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전파했다.

▲ 경주 보문관광단지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헌덕왕릉.
▲ 경주 보문관광단지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헌덕왕릉.


이어 원성왕은 즉위 이후 왕권 강화를 통한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고, 귀족들의 세력을 평정하기 위해 독서삼품과를 도입하는 등 제도개혁에도 노력했다.



원성왕은 아들 인겸을 태자로 책봉했지만 태자가 죽자 둘째 의영을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둘째와 셋째 아들까지 차례로 죽자 첫째 아들 인겸의 아들이자 손자인 준옹을 태자로 삼았다. 준옹이 나중에 39대 소성왕이 됐다. 소성왕이 일찍 죽으면서 아들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애장왕으로 즉위했다.



신라 제41대 헌덕왕은 동생들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의 목을 베고 왕위에 올랐다. 신라 최초 혈육 간의 왕 시해사건으로 기록된다.



헌덕왕은 할아버지 원성왕의 기개를 그대로 물려받아 치밀하면서도 성격이 거칠고,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손에 넣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 ‘흥덕’이라는 비편이 발견되면서 흥덕왕릉으로 비전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전해지는 흥덕왕릉의 귀부.
▲ ‘흥덕’이라는 비편이 발견되면서 흥덕왕릉으로 비전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전해지는 흥덕왕릉의 귀부.




◆비운의 왕들

헌덕왕과 흥덕왕 재위 27년 동안 내정은 어지러워지고 김주원 후손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또 이어지는 흉년으로 인한 도적떼들이 곳곳에 출몰하는 등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특히 왜구들의 노략질과 중국으로 이어지는 뱃길을 가로막는 해상도적들의 횡포가 심해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해졌다.



이때 당나라에서 돌아와 해상무역을 하던 장보고가 흥덕왕을 찾아와 청해진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장보고의 믿음직한 보고를 들은 흥덕왕은 1만 명의 군사를 모집할 권한을 부여하고, 장보고를 해상을 지키는 수장으로 명했다.



장보고는 왕의 허락에 엎드려 감사 인사를 올리고, 강력한 군대를 길러 해상왕으로 불리며 신라의 안전한 뱃길을 열었다. 그러나 흥덕왕이 왕위를 물려줄 아들 없이 죽자 치열한 왕위쟁탈전이 벌어져 신라는 크게 어지러워졌다.



원성왕의 셋째 아들 예영의 손자 제륭이 숙부인 김균정과 왕위를 두고 죽고 죽이는 전쟁을 벌였다. 당시 상대등이었던 균정은 아들 김우징과 김양, 아찬이었던 예징과 양순 등을 세력으로 규합해 제륭의 세력에 맞섰다.

▲ 희강왕을 죽이고 왕좌에 오른 민애왕의 능.
▲ 희강왕을 죽이고 왕좌에 오른 민애왕의 능.


제륭은 당시 시중이었던 처남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 등을 지지세력으로 두고 전쟁에 나서 월성언저리에서 죽고 죽이는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김명이 최고의 칼솜씨를 발휘했다. 김명은 20세의 젊은 힘을 바탕으로 이홍과 배훤백을 좌우장으로 삼아 적진을 향해 돌진해 무차별적인 살상을 감행했다. 우징과 김양도 감히 김명의 용맹 앞에 나서지 못하고 후퇴하다 상처를 입고 도주했다. 김명은 직접 적장 균정의 목을 베었다.



김명의 활약에 힘입어 왕권쟁탈전에서 승리한 제륭은 43대 희강왕으로 즉위했다.

우징은 적판궁의 싸움에서 아버지 균정을 잃고 도망쳐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했다. 이때 김양도 산속으로 도망쳐 세력을 모아 복수를 도모하다가 청해진으로 달려와 우징과 합류해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상대등의 지위에 오른 김명은 거칠 것이 없었다. 김명의 여동생 남편이었던 희강왕은 김명의 위세에 눌려 제대로 왕권을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처남 김명의 눈치를 살피는 입장이 되었다.

▲ 견훤에게 죽임을 당한 경애왕의 능.
▲ 견훤에게 죽임을 당한 경애왕의 능.


그러다 희강왕이 김명의 여동생을 함부로 대하며 여색을 밝힌다는 소식을 접한 김명은 다시 시중 이홍 등과 결탁해 희강왕을 죽이고 44대 민애왕으로 등극했다. 민애왕 김명은 충공의 아들이다. 충공은 흥덕왕 수종의 동생으로 태자에 올랐던 인겸의 아들이다.



배반의 왕인 민애왕도 목숨이 길지 않았다. 민애왕은 처남남매 간인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지만 1년 만에 김우징을 앞세운 김양의 군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청해진에 피신해 있던 김양은 장보고에게 “왕을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된 파렴치한 김명을 그대로 두고만 보아서는 안 된다”며 서라벌로 진군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장보고는 “나는 흥덕왕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고 말하며 자신은 청해진에 남았다. 대신 우징이 “내가 왕이 되면 장군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하자 이를 믿고 5천 명의 군사를 빌려줬다.



우징은 김양을 앞세워 서울로 단숨에 달려가 나약해진 왕궁을 무너뜨렸다. 민애왕도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칼에 맞아 숨졌다.



우징은 아버지의 복수에 성공하면서 45대 신무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신무왕은 전쟁 중에 당한 부상 등으로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죽으면서 신라 1천 년의 역사 중에 가장 단명한 왕으로 기록됐다.

▲ 견훤이 서라벌로 공격해 올 때 경애왕이 신하들과 잔치를 벌이던 곳으로 전하는 포석정.
▲ 견훤이 서라벌로 공격해 올 때 경애왕이 신하들과 잔치를 벌이던 곳으로 전하는 포석정.




◆김예겸과 경순왕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이 18년 재위하고, 아버지를 도와 왕권전쟁에 공을 세운 나이 많은 삼촌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조카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은 헌안왕은 화랑 응렴에게 왕권을 넘겨주었다. 경문왕으로 즉위한 응렴의 자녀 3남매는 차례로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으로 왕위를 이었다.



진성여왕은 남편 위홍이 죽자 화랑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정치가 어지러워 지며 신라가 멸망의 길을 빠르게 걷게 했다. 진성여왕의 실정에 귀족들의 세력싸움이 극에 달하고, 지방에서는 도적떼와 반발세력들이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후고구려, 후백제의 궐기가 왕성하게 일어나 신라의 영토는 좁아지고, 백성들의 삶은 급격하게 궁핍해졌다.



이때 이판 김예겸은 헌강왕의 서자 요를 사위로 맞아들이고, 진성여왕에게 요를 추천해 왕위에 오르게 했다. 김요는 12세에 효공왕으로 즉위했다. 예겸은 효공왕의 장인어른으로 나라의 살림을 맡아 휘두르는 실권자가 되었다.



나라 살림살이가 어지러운 상황이었고 귀족세력들이 이합집산하면서 서로 권력투쟁에 뛰어들어 나라의 질서가 무너졌다. 고을마다 도적떼들도 들고 일어나 후백제, 후고구려 세력에 합류하기도 하면서 신라를 공격하기에 이르러 신라의 영토는 처음 나라로 발전하던 시기의 영토 규모로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 어진.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 어진.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효공왕이 죽자 예겸은 헌강왕의 둘째 사위 경휘를 의붓아들로 삼고, 왕으로 추대해 신덕왕으로 즉위하게 했다. 이로써 박씨가 다시 왕위를 잇게 됐다.



신라의 마지막을 장식한 경순왕은 김효종의 아들로 이름은 김부이다. 효종랑은 진성여왕 당시 화랑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문성왕의 현손으로 헌강왕의 맏사위였다. 진성여왕에 이어 왕위를 이을 재목이었지만 전쟁에 나가 죽었다.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완전히 정복하고도 후백제에 편입하지 않고, 효종랑의 아들 김부를 왕으로 추대하고 돌아간 일은 역사를 두고도 그 의미를 깊이 새겨볼 일이다.



경순왕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왕으로 추대해 준 견훤을 배반하고, 고려의 왕건과 손을 잡고 나라를 지키려 하다 종국에는 고려에 항복했다.



경순왕이 고려와 싸우지 않고, 천년의 사직을 고스란히 헌납한 일을 두고, 겁쟁이라는 설과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 자존심도 돌보지 않은 성군이라는 평가도 있다.



경순왕은 고려의 정승이 되어 사심관으로 개경에서 살다 978년 4월 83세의 나이로 죽었다. 경순왕이 죽자 신라의 대신들이 고향에 장지를 마련하기 위해 시신을 경주로 운구할 때 방방곡곡에서 백성들이 경순왕의 장례에 참여하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고려왕실에서는 긴급하게 고려의 왕릉은 수도 개경에서 사방 100리 안에 설치해야 한다면서 경순왕의 장례 운구가 경주로 내려가는 것을 막았다. 이 때문에 경순왕릉은 개경에서 100리 길인 경기도 연천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의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나 있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신라사람들’을 응원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새해부터는 ‘신화 속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스토리텔링해 소개하겠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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