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등 1급 정교사 가정과 박선생. 정년퇴직하고 한 평 텃밭 얻어 김장배추 심었더니, 무려 열 포기나 우람하게 자랐더란다. 서른 몇 해 김장해 대던 언니, 동생, 동서들께 신나게 공표하고 처음으로 김장을 해보는데, 염도측정기를 못 구해 밤새워 절인 배추가 너무나 짜서 버무려둔 양념이 필요 없게 된지라, 소금 먹은 놈 물 켠다는 삼투압이 생각나서 한나절을 베란다에 절인 배추처럼 쪼그리고 앉아 그 배추 소금기 다 뱉어낼 때까지 물에 담가 두고 기다렸단다.//새빨갛게 양념 밴 고무장갑 낀 채로 한 양푼 들고 와 김치 맛 묻는데 배추 맛은 어디 가고 양념 맛뿐인지라 뒷집 김선생 차마 그 말을 못하여 머뭇거리고 있는데/“나, 가정선생했다는 소리만 식구들한테 하지 마소.”/앞집 김치 맛보다가 삶던 빨래 다 태운 뒷집 김선생/“나, 국어선생했다는 소문만 아니 내면 이 김치 맛, 시로 써드릴 수 있는데……”

「바다의 입술」(2023, 황금알) 전문



새색시가 있었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컸건만, 시집살이 열흘째, 혼자 김치를 담가야 하는 난관에 봉착했다. 이 새색시, 소금에 절이지도 않고 씻은 배추에 간장 붓고 고춧가루 마늘 양념 버무려 신랑 앞에 내놓았더란다. “근데 김치 색이 너무 시커멓지 않아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응을 살피는데, 신혼의 단꿈에 취한 신랑이 엄지를 척, 내밀었다고 한다. “진짜 맛있네, 자기 솜씨 최고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을 때는 입 안에도 꿀이 떨어지는 모양이다. 아무튼 그 새색시, 70년대 말에 모 대학의 가정과를 졸업했다나 어쨌다나.

“김장을 해보는데”, “김치 맛 묻는데”, “머뭇거리고 있는데”라며 이웃한 두 사람의 일상을 마치 생중계하듯 하는 화자가 아무래도 ‘뒷집 김 선생’ 같은 건, 그 김 선생이 왕년에 국어 선생이었다는 데서 오는 촉이다. 전공은 ‘가정과’임에도 불구하고 어설픈 살림 솜씨를 가진 가정과 박 선생은 그렇다 쳐도, 뒷집 김 선생이 국어 선생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숨겨달라는 건 아무래도 겸손을 동반한 위로다. 상대의 부끄러움을 덮어주는 방법은, ‘너나 나나 피장파장’이라며 자기의 모자란 점 하나 은근슬쩍 흘리는 게 상책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가정과(家政科)가 김치랑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물으신다면 김치 없는 밥상을 생각할 수 있냐는 질문을 되돌려 드릴 수밖에 없다. 중학교・고등학교에서 가정생활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 태도 따위를 가르치는 교과가 가정과다. 하지만 가정과 교사와 조리사는 엄연히 다르다. 실전이 이론에 미치지 못했던 가정과 박 선생이 우습기는커녕 친근하고 인간미 넘치는 이유다.

박 선생은 자신의 어설픈 솜씨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매력까지 갖춘 사람이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작가로서의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죽을 때까지 모르다 갈까 봐 걱정스럽다. 제발 소문나지 말아야 할 텐데…….



신상조(문학평론가)





김광재 기자 kjk@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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