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예술의 전당 북쪽 황성공원에 조성된 박혁거세 동상.

 

신라 초대 왕을 지낸 박혁거세는 61년에 걸쳐 나라를 덕으로 다스린 훌륭한 군주로 전하고 있다. 그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알에서 태어난 난생설화가 신비로운 설화로 기록되고 있지만 선도산 성모의 아들로 자라 왕이 되었다는 설화도 삼국유사 등에서 전하고 있다.

 

난생설화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고, 같은 삼국유사에서 황제의 딸이 낳은 아이라는 설과 두 가지를 같이 기록하고 있어 역사의 기록을 연구하게 하는 과제로 남아 있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장소 남산자락의 나정과 성모설화의 흔적 성모사가 선도산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어 상상력을 자극하며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자원이 되고 있다.

 

선도산 8부 능선에 조성된 성모사유허비.

 

◆신화: 백마와 난생

거서간으로 불린 신라 초대 왕 박혁거세의 탄생에 대해 두 가지의 설화가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실린 설화를 기준으로 요약해 소개한다.

△ 알에서 태어난 아이: 육부촌장들이 BC 69년 3월 초하루에 각각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둑 위에 모여 “우리들은 백성을 다스릴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안일하고 제멋대로 하고 있다”면서 “덕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을 삼고 나라를 창건하자”고 의논했다.

이때 양산 아래 나정에서 이상한 기운이 번지면서 번개와 같은 빛이 사방으로 번지고 있었다. 촌장들이 나정으로 가보니 백마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보고 말이 길게 울면서 하늘로 날아가버렸다. 그 자리에 자줏빛 알이 하나 있었다. 알을 깨어보니 사내아이가 있었다. 아이를 동천에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니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은 맑고 밝았다. 아이 이름을 ‘혁거세’라고 했다.

같은 날 사량리 알영 우물가에 계룡이 나타나 그 왼쪽 겨드랑이로 딸아이를 낳으니 그 용모가 수려하였으나 입술이 꼭 닭의 부리와 같았다. 이내 월성의 북천에서 미역을 감기자 입부리가 떨어졌다.

궁실을 남산 서쪽 기슭에 세우고 두 신령스러운 아이를 봉양하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태어났으되, 알이 박과 같으므로 그 성을 ‘박씨’로 삼았다. 딸아이는 그녀가 태어난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 이름지었다. 그들 나이 열셋이 되었을 때 왕과 왕후로 삼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서벌·사라 혹은 사로라고 일컬었다. 더러 계림국이라고도 하였으나 뒤에 신라로 고쳐서 전하였다.

 

성모사 바로 뒤편에 조성된 선도산 마애여래삼존입상.

 

△ 성모의 아들: 진평왕 대에 행실이 어진 ‘지혜’라는 이름의 여승이 있었다. 안흥사에 머무르며 불전을 새로이 수리하고자 하였으나 힘이 모자랐다. 꿈에 비취옥으로 머리를 장식한 예쁜 모습의 선녀가 와서 “나는 선도산 신모이다. 네가 불전을 수리하려는 것이 기뻐서 금 열 근을 시주하여 돕고자 하니 그대가 앉아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찾아다가 주존 부처님 세 분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53명의 부처와 6류성중 및 여러 천신과 오악의 신들을 그려라. 해마다 봄 가을에 열흘 동안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널리 일체중생을 위하여 점찰법회를 베푸는 것을 변하지 않는 규칙으로 삼아라”고 했다.

 

지혜가 놀라 꿈에서 깨어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가 좌석 밑을 파서 황금 160냥을 찾아 불전 수리를 이루었으니 이러한 공적은 모두 신모가 일러주는 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그 사적만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불법의 행사는 없어진 지 오래다.

 

신모는 본래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신라에 와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돌아가지 않으니 그의 아버지인 황제가 솔개 발에 편지를 매달아 보내 말하기를 “솔개를 따라가다가 멈추는 곳에 집을 지어라”고 했다.

 

사소가 편지를 읽고 솔개를 날려보내자 선도산으로 날아가 멈춤으로 마침내 여기에 와서 집을 짓고 지선이 되었다. 그래서 산 이름을 ‘서연산’이라고도 부른다. 신모가 오랫동안 이 산에 머무르며 나라가 평안토록 도우니 신령스럽고 신이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나라가 세워진 이래로 삼사 중의 하나로 삼았으며 등급으로는 여러 명산대천 제사의 윗자리를 차지하였다.

 

신모가 처음 진한에 와서 신성한 아들을 낳아 신라의 처음 임금이 되었으니 혁거세와 알영의 두 성인이 태어난 근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룡, 계림, 백마 등으로 일컬으니 닭은 서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신모가 일찍이 하늘나라의 여러 선녀들에게 비단을 짜게 해서 붉은 물감을 들여 관복을 만들어 그의 남편에게 주었다.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그의 신비스런 영험을 알게 되었다.

 

선도산 9부 능선에 조성된 성모사.

 

◆흔적: 나정과 성모사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나정은 경주 탑동에 흔적이 남아 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발굴한 결과 우물터와 팔각정의 거대한 건물터가 드러났으며 ‘나정’이라는 글이 새겨진 기와를 비롯해 1천3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건물터는 제사를 모셨던 신궁으로 추정된다. 최근 건물의 기초를 복원하고, 주변을 정비했다. 건물터 옆에는 신라시대 우물의 흔적이 남아 있어 위치에 표석을 설치하고 메웠다.

 

또 선도산 정상 부근에는 박혁거세를 낳은 신모가 살았고, 그 신모를 위해 제사를 올리는 사당 ‘성모사’가 있으며 주변에 마애여래삼존입상이 웅장한 모습으로 역사를 고증하고 있다.

 

박혁거세가 처음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렸던 궁궐은 창림사가 있었던 절터에 위치하고 있다고 전한다. 창림사지에서는 삼층석탑과 건물지, ‘창림’이라는 명문기와 등의 많은 유물이 나왔다. 삼층석탑은 복원해 보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절터에는 또 쌍귀부가 발견돼 지금까지 현지에 엎드려 있다.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전해오고 있는 성모사가 위치한 선도산 정상.

 

◆스토리텔링: 거서간의 탄생

박혁거세의 아버지는 진한 사람으로 인자하고 지혜로웠다. 그의 얼굴은 항상 웃음기를 띠고 환했다. 훤칠한 체격으로 무술 실력이 뛰어났으며,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사냥한 고기를 팔기도 하고 이웃에 나눠주기도 했다.

 

그래서 평판이 좋았다. 사람들은 그를 ‘덕공’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덕공이 바닷가에서 난파선에 떠내려온 사람을 구했다. 그는 중국 황실의 넷째 아들이었다. 왕자는 지혜로우면서도 호기심이 많아 여행을 좋아했다. 배를 타고 여행을 하던 왕자가 풍랑을 만나 진한 땅으로 떠내려와 심덕이 좋은 덕공을 만난 것이다.

 

왕자는 무예를 비롯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왕자는 이미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었으며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왕자는 진한 덕공의 보살핌으로 10년이나 살면서 그의 지식과 각종 비법을 덕공에게 고스란히 전수했다.

박혁거세가 탄생한 나정 사적지의 우물터.

 

왕자가 죽음을 앞두고 덕공에게 부탁했다. 중국 황실에 자신이 체득한 비법들을 기록한 책과 왕자의 편안한 죽음을 직접 전해 달라는 것이었다.

 

덕공은 왕자의 장례를 후하게 치르고, 행장을 꾸려 중국으로 건너가 황제를 만났다. 황제는 태자가 직접 기록한 문서들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안타까워 하면서 덕공에게 3년만 머물러 주기를 간청했다. 왕자의 경황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싶었던 황제의 욕심이었다.

 

황제는 날이 갈수록 덕공의 인품과 학식이 뛰어난 것을 알게 됐다. 또 덕공에게서 잃어버린 자식의 냄새가 불쑥불쑥 치미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면서 그와 가까이 하고 싶었다. 그러다 셋째 공주와 결혼하도록 했고, 덕공은 중국에서 황제의 사위가 돼 벼슬을 하게 됐다. 아들과 딸을 낳았다.

경주 탑동에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어린 나정 건물터를 복원한 기초.

 

덕공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공부한 모든 것을 어린 아들에게 전수했다. 아들의 얼굴이 덕공을 닮아 박과 같이 훤하다고 해서 ‘혁거세’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세상을 밝게 하라는 뜻도 함께 담고 있다.

 

덕공은 죽음을 앞에 두고 아내와 아들에게 “나를 있게 한 진한 땅의 사람들을 보살펴야 하는 일이 나의 가장 큰 책임”이라며 “나는 죽어 이 땅에 묻힐지언정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을 정리해 진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라”고 유언했다.

 

혁거세는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한 줌 재로 변한 유골을 보쌈에 넣은 채 황제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부탁했다. 황제는 딸과 손자 혁거세에게 많은 보물과 무기, 군사를 실은 큰 배 10척을 주고 편안하게 잘 살라고 기원하며 배웅했다.

혁거세는 어머니와 함께 남산자락에 작은 마을을 만들어 함께 온 사람들과 거주지를 마련했다.

 

혁거세는 아버지에게 배운 무술과 많은 지식들을 다시 정리하는 한편 황제가 호위무사로 보낸 무송도사로부터 창과 활, 검과 도, 다양한 비기들의 제조 기술과 다루는 법 그리고 군사적 전술 전략도 배웠다.

신라 최초의 궁궐터 창림사지에서 발견된 쌍귀부.

 

박혁거세는 이미 철제 무기로 무장한 군사들을 단련하고 있었다. 주변 진한마을의 부족들은 아직 청동기문화로 뒤떨어진 무기를 가지고, 무예 또한 혁거세에 비하면 한참이나 뒤떨어져 있었다.

 

기원전 57년, 박혁거세는 진한의 육부촌장들을 소집해 회의를 개최했다. 육부의 촌이 함께 뜻을 모아 튼튼한 나라로 발전시켜 백성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자는 데 뜻을 모으고, 실력 대결을 거쳐 최초의 신라 왕이 됐다.

 

육부촌장들을 비롯한 백성들은 뛰어난 무기를 가지고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실력을 가진 혁거세를 존경하며 따랐다. 박혁거세는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교육하면서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이 글은 문화산업화를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일반 기록물 또는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