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이씨 옥산문중에는 어느 문중보다 수량이 많고 종류가 다양한 고문서가 잘 보존돼 있다.

손가락을 굽혀서 꼽을 수 있는 정도로 매우 뛰어나 수많은 가운데서 희소한 것을 굴지(屈指)라고 한다. 소수서원, 도산서원, 옥산서원, 병산서원은 우리나라 굴지의 서원이다. 이 중에서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을 제향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옥산서원을 품고 있는 독락당은 여주 이씨 옥산문중이 500년 넘게 세거하고 있다.

회재 이언적은 김굉필, 정여창, 이황, 조광조와 함께 동방 5현으로 꼽히며 문묘에 배향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선현이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문집저술에 참여한 면면을 보면 그 사람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회재의 문집 서문은 소재 노수신이 지었다. 발문은 미암 류희춘과 초당 허엽이 지었고, 행장은 퇴계 이황이 지었으며, 신도비명은 고봉 기대승이, 묘지는 백사 이항복이 지을 정도로 명현들이 회재를 기린 것으로 보아 도학과 문장으로 추앙을 받았던 큰 선비였음을 알 수 있다.

유학을 중시한 조선은 국가의 주요 서적들을 보존·관리하기 위해 장족산,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에 사고(史庫)를 설치한 특별한 나라였다. 또한 국립왕실연구기관이자 도서관인 집현전과 규장각, 전국 330여 개 공립학교 성격인 향교의 서고인 존경각과 장서각, 400여 개 사립학교 성격인 서원의 서고 등 전국에 책을 중시하는 도서관 유적을 갖춘 나라였다.

경주 옥산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조선시대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자 개인의 목표였다. 따라서 이 시대 사람들은 학문과 자신의 수양을 위해 문헌수집과 책의 보존을 생명과도 같이 소중하게 여겼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가문의 고서와 고문서가 산실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조상들이 남긴 고서와 고문서를 가문의 보물로 500여 년 온전하게 지켜온 경주 안강의 독락당 여주이씨 옥산문중에는 고서의 향기가 가득하다. 옥산서원의 4천 여권 고서와 독락당과 어서각에 소장된 3천여 종의 고문헌 중에서 보물급 자료만 119종으로 전국의 문중에서도 굴지의 방대한 규모이다.

영천에서 포항으로 향하는 28번 국도에서 안강휴게소를 지나 안강 들판길 왼쪽에 있는 옥산서원과 독락당 가는 길로 접어들면, 풍광 좋은 자계천에서 숲과 계곡이 가장 아름다운 곳에 터를 잡은 독락당과 옥산서원이 보인다. 독락당을 방문하면 유교문화와 보물급 고문서를 통해 세월을 뛰어넘는 은은한 문화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독락당은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다. 회재 선생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건물이다.

회재 이언적의 삶과 학문

회재는 여주 이씨 시조로부터 11세로 양동마을에서 태어나 23세(1513)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24세에 별시문과에 합격한 수재였다. 31세(1521)에 중종의 명으로 이적(李迪)에서 이언적(李彦迪)으로 개명하였다. 33세에 정6품의 성균관 전적과 병조좌랑, 이조좌랑에 차례대로 임명되었다. 34세에 경상도 안동현감을 거쳐 40세에 종3품의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다. 41세에 김안로가 아들을 효혜공주와 혼인시키면서 권력을 남용하자 그의 재 등용에 반대하다 김안로 일당의 배척을 받아 좌천 후 파직되어 귀향하였다.

회재는 고향마을 별장에 보물 413호로 지정된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다음해에 계정(溪亭)을 지은 뒤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독락당은 화개산, 자옥산, 무학산, 도덕산 등 사산(四山)이 둘러있다. 자옥산에서 시작된 맑은 계곡의 넓은 바위마다 각각 세심대, 관어대, 탁영대, 정심대, 영귀대 등 오대(五臺)라 명명하고 4산5대를 벗삼아 학문을 닦고 심신을 정화하였다.

구인당은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강당이다.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47세에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다시 조정에 출사하여 종5품의 홍문관 부교리, 정4품의 홍문관 응교에 임명되었다. 50세에 정2품의 예조참판, 정3품의 성균관 대사성, 종2품의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52세에 정2품의 이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로 판서의 반열에 올랐다. 53세에 경상도관찰사에 이어 54세에 종1품의 의정부 우찬성, 56세에 종1품의 의정부 좌찬성에 임명되었으나 윤원형 일당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관직에서 물러났다. 57세에 윤원형 일당이 양재역벽서사건에 회재를 무고하게 연루시켜 삭탈관직 후 강계로 유배시켰다. 59세에 유배지에서 ‘대학장구보유’를 저술하였고, 60세에 ‘봉선잡의’, ‘구인록’, ‘진수팔규’를 지었다. 63세(1553)에 ‘중용구경연의’를 완성하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회재 사후 13년 뒤 아들 이전인(李全仁)이 명종에게 ‘진수팔규’를 올리자 회재의 관직이 회복되었고, 사후 15년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아들 이전인에게도 벼슬이 내려졌으나 임금에게 사은소를 올리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사후 19년 독락당 남쪽에 서원이 건립되었고, 이듬해 회재의 위패가 봉안되었으며 선조로부터 옥산서원으로 사액(賜額)되었다. 사후 22년 ‘회재선생문집’이 목판본으로 간행되었고, 사후 57년(1610) 성균관 문묘에 종사(從祀)되었다.

회재의 삶을 살펴보면, 63년의 생애 동안 당리당략과 사리사욕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미덕을 실천하였으나 두 번의 큰 시련을 겪었다. 한 번은 41세에 간신 김안로의 등용에 반대하다 파직되어 낙향하여 독락당에 머물렀고, 다른 한 번은 57세에 무고한 사건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해배되지 못한 시련 끝에 별세하였다.

모든 인물에 대한 평가는 후대에 결정된다. 오늘날 회재는 종1품의 좌찬성에 오른 최고의 공직자이자 탁월한 학문적 성과로 영남유학의 문을 연 뛰어난 학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옥산서원의 출입구인 외삼문

어서각에 보존된 3천 종의 고문헌

회재의 아들 이전인이 책과 문서들을 보관하기 위해 어서각(御書閣)이라는 서고를 1554년 독락당 안에 만들었다. 어서각은 중종, 인종, 명종 등 ‘임금이 하사한 책과 문서가 보관된 서고’라는 뜻이다. 이후 여주이씨 종가에서 만들거나 외부에서 받은 책과 문서나 편지 등을 지속적으로 추가하여 보전되었다.

독락당과 옥산서원은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옥산서원에는 보물 525호인 ‘삼국사기’와 ‘동국이상국집’ 등 고서 4천여 권과 호구단자, 명문 도록 등 1156건의 고문서, 책판 등 1천123판, 정조어필보관함, 회재유묵함 등 유물 24건을 포함하여 6천여 점의 문화유산이 수장되어 있다.

독락당 어서각에는 고서 384종, 고문서 2천540종 등 총 3천43종의 고문헌이 보존되어 있다. 이 가운데 보물급 소장자료만 119종이다. 회재선생의 필사본 일괄 13책은 1975년 보물 586호로 지정되었다.

이 가운데 회재의 학문적 깊이를 엿볼 수 있는 필사본 13책을 소개한다. ‘속대학혹문’ 1책은 회재가 주자의 대학혹문에서 논하지 못한 항목을 추가한 책이다. ‘대학장구보유’ 1책은 주자의 대학장구에서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점을 지적하고 정자의 뜻에 따라 장의 순서를 바꾸고 뜻을 새롭게 해석하였다. ‘봉선잡의’ 1책은 회재가 직접 쓴 친필본으로 제례에 관해 저술한 책이다. ‘진수팔규’ 1책은 유배지 강계에서 지은 상소로 역경의 덕을 이루고 업을 닦는다(進德修業)는 뜻을 가지고 8조목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임금에게 이 책을 올리려고 하였으나 당시 평양감사의 만류로 올리지 못하고 서세했다. 회재 사후에 아들 이전인이 명종에게 올리자 명종은 회재의 벼슬을 회복시킬 것을 명하는 전교를 내렸다. ‘중용구경연의’ 9책은 중용 20장에 나오는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원칙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한 책이다.

현재 회재의 저서는 한글로 번역되거나 단행본으로 나온 게 각각 10여 권이고, 석박사학위논문 30여 편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체인묘는 이언적의 사당이다. 보통 서원에서 제향을 하는 사당에는 사(祀)자를 쓰는데 이곳은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정도로 좀 더 격이 높은 경우에 사용하는 글자인 묘(廟)를 쓰고 있다.

고문서를 지켜낸 후손들의 노력

옥산문중의 심장인 독락당과 소중한 고문서를 소장한 어서각을 500년 동안 지켜온 주인은 회재의 후손들이다. 회재의 아들이자 유일한 제자였던 이전인은 귀양가는 아버지를 따라가 밤낮으로 7년 동안 시중을 들면서 회재의 언행을 기록한 ‘관서문답록’을 만들었다. 회재가 별세하자 추운 겨울에 관을 싣고 3개월 간 평안도, 강원도 산길을 거쳐 경상도 포항 달전 선영에 모신 뒤 3년상을 치르고, 명종에게 상소를 올려 부친의 복권을 허락받은 효자였다. 회재의 손자 이준은 아버지 이전인의 뜻을 이어 옥산서원 설립을 주도하면서 명문가의 기틀을 만들었다.

현재 회재의 18세 종손인 이해철씨는 문중의 고문서와 전적이 온전히 보존된 연유를 설명했다. 왜란, 호란의 양란 때 선조들이 지켜냈고, 일제강점기에 16세손 조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한다. 조선총독부에서 독락당 어서각에 ‘삼국사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탈취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조부는 미리 인근 집 장롱에 감추어두고 도둑맞았다고 하였으나 다음에 다시 총독부에서 예고없이 찾아와 없다고 하니 빰을 때리고 돌아갔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는 모든 유품들을 마루 밑, 장독 속, 땅속에 묻어 두고 피란가는 등 전적과 고문서의 보존을 위해 수많은 선조들이 목숨처럼 지켜낸 덕분이라고 말한다. 숱한 어려움 속에 고문헌의 보고를 지켜낸 문중의 종손인 그의 말에는 선조들에 대한 경외심이 가득했다.

정태수(우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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