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혁거세 재위 61년 3월 하늘로 올라간 7일 만에 5체로 분시되어 땅으로 떨어져

▲ 오릉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숭의문.
▲ 오릉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숭의문.

신라 천년의 문을 연 박혁거세는 출생이 신화로 소개되었듯 죽음 또한 신화로 전하고 있다. 알에서 태어나 덕왕으로 살다가 하늘로 올라간 이후 분시되어 지상으로 추락하는 비운의 죽음을 맞은 이야기로 전하고 있다.

절대적인 힘으로 왜구들의 노략질을 막아내면서 백성들을 위한 덕을 베푸는 덕치로 후세에 길이 전하고 있지만 죽음은 끔찍할 정도로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반란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덕왕의 끔찍한 최후를 고하는 두 가지 신화를 소개하면서 신라 최초의 권력 암투에 대한 드라마를 추측해본다. 왕과 왕비가 같은 날 죽은 것과 죽음 이후 7일 만에 시신을 찾게 된 것, 장남이 아닌 둘째 아들이 왕위를 이은 것이 이러한 역사를 추측하게 한다.

◆신화: 거서간의 죽음

1. 서라벌은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밤마다 혁거세가 궁궐을 빠져나가 어딘가를 다녀오는 눈치를 챈 알영 부인의 고민이 깊어졌다. 하루는 혁거세가 밖으로 나갈 때 파리로 변해 따라나갔다. 혁거세가 타는 말꼬리에 붙어 있었는데 말은 순식간에 구름을 뚫고 옥황상제의 궁궐에 도착했다.

땅에서의 일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돌아올 혁거세를 축하하는 잔치였다. 옥황상제가 축배를 들던 잔을 내려놓고 버럭 화를 내며 “혼자 오기로 한 약속을 왜 어긴 것이냐”라며 혁거세에게 호통을 쳤다.

혁거세는 당황해 하며 혼자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옥황상제가 빗으로 말꼬리를 빗겨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파리가 떨어지더니 알영 부인으로 변했다.

알영 부인은 옥황상제에게 “제 생각이 좁아 남편을 의심하고 따라왔습니다”라며 용서를 빌었다. 옥황상제는 알영 부인을 땅으로 내려보냈다. 다음 날 서라벌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천둥번개가 치면서 하늘에서 무엇인가 떨어졌다. 백성들을 덕으로 다스리던 거서간 박혁거세의 몸이 다섯 조각으로 나누어진 채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 순간 알영 부인도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백성들이 왕의 무덤을 만들었지만 거대한 뱀이 거서간의 몸을 자꾸 흩어지게 만들어 어쩔 수 없이 다섯 개의 봉분으로 무덤을 조성했다. 그래서 박혁거세 왕릉을 ‘오릉’이라 부른다.

▲ 넓은 공원으로 조성된 오릉의 연못.
▲ 넓은 공원으로 조성된 오릉의 연못.

 

2. 박혁거세는 60여 년 간 나라를 다스리면서 백성들을 잘 보살펴 백성들은 풍요롭고, 이웃나라들도 칭송하며 전쟁을 걸어오지 않아 평화로웠다. 태평성대를 이룬 시기였다. 그러던 중 재위 60년에 이른 어느 날, 용 두 마리가 금성의 우물에 나타났다. 그리고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오더니 성의 남문에 벼락이 떨어졌다. 마치 하늘이 나쁜 일을 예고하는 듯했다.

그 이듬해 3월 왕이 하늘로 올라갔다. 그로부터 7일 후에 왕의 몸이 머리와 양손, 두 다리 등 다섯으로 나뉘어 흩어져 땅에 떨어졌다.

백성들이 슬픔에 잠겨 왕의 시신을 모아 장례를 치르는데 큰 뱀이 나타나 방해를 했다.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머리와 사지를 따로 장사를 지내 봉분이 다섯 개나 되는 무덤, ‘오릉’을 만들었다. 그래서 오릉이고, 뱀이 방해를 했다고 하여 ‘사릉’이라고도 부른다.

▲ 숭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홍살문.
▲ 숭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홍살문.

 

 

◆흔적: 오릉과 숭덕전, 알영정

신라 초대 왕 박혁거세 거서간에 대한 흔적으로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나정과 성모사에 이어 죽음에 대해서는 오릉, 숭덕전, 알영정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오릉은 경주시가지에서 경주고속도로 인터체인지로 진입하기 직전 삼릉네거리에 위치해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박혁거세와 알영 부인의 무덤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지금 학자들은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따라 신라 초대 왕인 박혁서세,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 그리고 알영 부인의 무덤으로 설명하고 있다.

오릉 고분은 앞부분의 대형 1기와 가운데 조금 작은 고분, 그리고 그 뒤의 좌우에 규모가 훨씬 적은 세 기의 고분이 옹기종기 무리를 이루고 있다.

오릉은 봉분의 구조를 보아 가장 앞의 대형분은 적석목곽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뒷부분의 작은 분묘는 규모 등으로 미루어 왕릉으로 보기 어렵고, 왕족묘와 배장묘일 것으로 추정한다.

▲ 박혁거세의 치적과 숭덕전 건립 경위를 기록하고 있는 신도비.
▲ 박혁거세의 치적과 숭덕전 건립 경위를 기록하고 있는 신도비.

△알영은 박혁거세의 부인으로 왕비의 신분이다. 알영정이라는 우물가 계룡의 옆구리에서 태어나 노파가 길러 왕비가 되었다. 박혁거세가 죽고 이어 같은 날에 죽어 함께 장례를 치른 것으로 전한다. 오릉의 동남쪽 숲에 알영이라는 우물이 있고, 우물 앞에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문이 기록된 기념비가 조성되어 있다.

△오릉과 알영정의 바로 옆 동남쪽에 60년 동안이나 백성들을 위해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박혁거세를 추모하기 위한 숭덕전을 건설해 매년 봄 가을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숭덕전은 조선시대 세종 11년 처음 지어진 제실이지만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것을 선조 33년 다시 지었다. 영조 때 박혁거세의 공덕과 숭덕전 중건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신도비를 세워 지금까지 보존관리하고 있다. 세종 때에는 나라에서 향사를 주관했으나 조선 후기 이후에는 박씨 문중에서 숭덕전을 관리하면서 향사를 주관하고 있다.

▲ 박혁거세의 사당 숭덕전 입구의 영숭문.
▲ 박혁거세의 사당 숭덕전 입구의 영숭문.

 

 

◆스토리텔링: 석연치 않은 거서간의 죽음

박혁거세는 중국 황실에서 전해오는 비법에 추가해 아버지가 터득한 심법을 기록한 양피지를 닳고 닳을 정도로 읽으면서 진의를 깨닫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물론 양피지 두 장에 빼곡하게 기록된 심법과 보법의 형식 등은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지만 새로운 의미를 새겨보기 위해 아버지의 혼이 묻어있는 양피지를 거듭해서 꼼꼼히 읽어보는 것이다.

특히 심법에서 기록하고 있는 부분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실현하는 일은 도저히 이루어낼 수가 없어 오래도록 고심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비서의 내용을 터득하지 못했지만 박혁거세의 무예에 견줄만한 사람은 진한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무술실력은 뛰어났다. 또한 껑충하게 큰 키에다 근육질로 다져진 체구는 마주 서기만 해도 일반사람들은 저절로 기가 꺾일 정도로 우람했다.

그러나 박혁거세는 육체적인 능력보다 내적으로 다져진 힘이 더욱 강한 사람이었다. 뛰어난 무술실력에다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혁거세가 신라의 왕위에 오르고, 섬세하고 넓은 포용력으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한편 혁거세는 자신이 다 터득하지 못한 비법을 동해와 남해, 서해 세 아들들에게 전수하고, 스스로 깨우치기를 바라면서 수련을 독려했다. 혁거세의 아들들에 대한 교육은 아주 엄격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세 아들들은 아버지를 닮아 모두 신체가 강건하고 지혜로웠다. 특히 첫째는 육체적인 면에서 뛰어나고 성격이 직설적이면서 괄괄했다. 둘째는 육체적으로도 뛰어났지만 침착하고, 참을성이 많을 뿐 아니라 심법을 익히는데 빠른 성취를 보였다. 셋째도 성품이 온유한 편이어서 맏이를 두려워하면서도 잘 따르는 편이어서 형제들 간에는 우애가 매우 깊었다.

▲ 박혁거세 거서간의 왕비 알영 부인이 출생한 우물 알영정.
▲ 박혁거세 거서간의 왕비 알영 부인이 출생한 우물 알영정.

혁거세가 즉위 30년을 넘어서면서 걱정이 생겼다. 중국 황실에서 사신을 보내 신라 백성들도 모르고 있는, 박혁거세가 창고 깊숙이 숨겨두고 진의를 깨닫기 위해 애지중지하고 있는 신라의 보물, 그 비법이 적힌 비서를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중국 황태자가 이루어낸 성취로 만든 비급보다 혁거세의 아비가 발전시킨 비급이 더욱 뛰어나다는 것을 중국 황실에서 알게 되면서 뒤늦게 이를 탐내고 있는 것이다.

박혁거세는 이러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비법의 내용을 이미 완벽하게 암기하고, 아들들에게도 익힐 수 있도록 내용을 이미 전수해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혁거세는 스스로도 그 이치를 완벽하게 깨우치지 못한 아버지의 혼이 담긴 비법서를 중국 황실에 빼앗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혁거세는 아무도 모르게 비법서를 팔등분하고, 아버지의 유품과 신라 고유의 보물이라고 할 토기 등의 물품들을 60개의 상자에 밀봉하고, 서라벌의 서쪽지대에 거대한 봉분을 만들어 묻어버렸다. 아무도 도굴할 수 없도록 무덤은 큰 바위로 먼저 상자를 애워싸고, 다시 작은 돌과 자갈로 덮고, 찰흙으로 덧씌운 다음 마사토로 봉분을 완벽하게 봉해버렸다.

이러한 사실이 중국 황실로 전해지면서 중국으로부터 박혁거세에 대한 노골적인 견제가 시작되었다. 심지어 황제를 추천해 준다면서 혁거세의 퇴진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혁거세의 입장이 워낙 완강하고, 신라 왕실의 조직 또한 탄탄하여 중국의 이간질도 잘 먹혀들지 않았다.

▲ 오릉과 숭덕전 사이에 조성돼 있는 대나무숲길.
▲ 오릉과 숭덕전 사이에 조성돼 있는 대나무숲길.

그러나 중국 황실의 간섭은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중국 황태자가 미처 완성을 보지 못했던 비법의 힘이 대자연의 이치를 유도하여 태산도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중국 대륙의 통일을 위해 그 비서를 손에 넣으려는 것이었다. 중국 황실의 집요한 야욕이 지속적으로 개입되면서 박혁거세의 치밀한 작전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중국은 박혁거세를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왕의 자식들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들은 신라 왕실의 권력구도를 분석하고, 육부촌장들과 왕실의 관계까지 치밀하게 파고들어 후계구도를 뒤집으려 했다. 그들은 박혁거세와 밀착된 양산촌과 고허촌장을 배제하고 나머지 진지촌, 대수촌, 가리촌, 고야촌의 실력자들과 음성적인 거래관계를 깊숙하게 맺었다. 중국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세력은 무력은 물론 재정적으로도 워낙 탄탄한데다 혼인으로 인연고리를 맺어 신라 육부촌장들이 옴짝달싹 할 수 없도록 옭아맸다.

중국의 지시를 받은 일부 육부촌장들이 왕실을 뒤집어엎기 위해 후계자를 추천하는 안건을 상정하자 양산촌의 알평촌장과 고허촌의 소벌도리공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서 무산됐다. 미리 이러한 상황을 예견한 중국의 세력들은 귀족들의 화백회의가 열리는 틈을 타 경계가 느슨해진 궁으로 잠입해 왕과 왕비, 태자를 무색무취한 독으로 중독시킨 뒤 암살하고는 사라져버렸다.

다음 날 남해와 알평을 비롯한 육부촌장들이 밀실조직까지 총동원해 암살단을 추적했다. 7일 간 10명의 암흑세력 추종자들을 색출했지만 모두 죽음으로 입을 닫아 버려 실질적인 배후를 잡아내는 데는 실패하고, 잔인하게 살해된 왕과 왕비, 태자의 시신을 오릉에 장사지냈다.

남해는 박혁거세에 이어 신라 2대 왕으로 즉위해 내부 결속을 다지고, 백성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일에 전념하는 한편 암암리에 아버지와 어머니, 형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한 일을 추진하는데 힘을 집중했다.

*이 글은 문화산업화를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일반 기록물 또는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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