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에서 영천으로 이어지는 4번 국도의 건천읍 금척리 고분군 안내 표지석과 고분군.
▲ 경주에서 영천으로 이어지는 4번 국도의 건천읍 금척리 고분군 안내 표지석과 고분군.

 

경주에서 영천으로 이어지는 4번 국도 건천 지역에 도로를 사이에 두고 동서쪽으로 나누어졌지만 30여 기의 고분이 밀집해 있다. 사적지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금척리 고분군이다.

 

금척리 고분군은 신라 박혁거세 당시에 죽은 사람도 살아나게 한다는 보물 금척을 중국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묻었다는 이야기가 기록으로 전하고 있는 역사문화유적이다. 또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발굴을 시도하다가 갑자기 쏟아져 내린 소나기가 신의 게시라 믿고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고고학자들의 입으로 전해오고 있다.

 

금척리 고분군은 신라 초기에 조성된 고분군으로 모량리 지역, 신라시대 모량부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조사를 거쳐 5월부터 발굴할 계획이라 밝혀 어떠한 유물이 쏟아질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도로 서쪽의 금척리 고분군을 북쪽에서 바라본 전경.
▲ 도로 서쪽의 금척리 고분군을 북쪽에서 바라본 전경.

 

 

◆신화 : 하느님의 선물 금척

경주 건천읍 지역 금척리 고분군에 대한 전설과 설화 두 편이 전해오고 있다.

1. 동경잡기는 다음과 같은 금척에 대한 전설을 싣고 있다.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는 나라와 백성들을 바르게 다스리기 위해 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어느 날, 궁궐의 뜰에서 왕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동자가 나타나 말을 걸어왔다.

“저는 하느님의 사자입니다. 하느님께서 신라 건국을 축복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잘 다스리기를 바라는 마음에 금척을 선물로 보내셨습니다”라며 번쩍거리는 금으로 만든 금척을 왕에게 건넸다.

왕이 무엇인지 묻자 사자는 “이 금척으로 아픈 사람을 재면 병이 낫고, 죽은 사람을 재면 다시 살아나게 하는 보물이니 선한 마음으로 사용하고 잘 간직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전하고는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중국 한나라의 황제가 신라에 금척이라는 보물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것을 잠깐 보고 돌려줄테니 빌려달라고 사신을 보냈다는 소식이 박혁거세 거서간에게 전해졌다.

왕은 대신들을 불러 금자를 빌려주는 것이 좋을지 의견을 물었다. 대신들은 저마다 의견을 내놓았다. “한나라는 자신들이 강한 것을 믿고 이웃 나라들을 괴롭히고 있다”면서 “금자를 빌려주면 이웃나라들을 더욱 괴롭히게 될 것이므로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아 반대했다.

▲ 고분군 북쪽의 금척리 마을 표지석.
▲ 고분군 북쪽의 금척리 마을 표지석.

 

왕은 “아무리 귀한 보물이라지만 잠깐 보고 돌려준다는데 거절한다는 것은 도리가 아닌듯 하오”라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려워했다.

그러자 한 신하가 “그 금자는 땅에 묻어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람의 목숨이란 한도가 있는데 죽어야할 사람이 자꾸 살아난다면 인구가 차고 넘쳐 새로 태어날 자손들이 위험하게 될 것입니다”고 했다. 이어 “또한 그러한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괜히 강한 나라의 욕심을 자극해 침략을 받을 염려도 있습니다”라며 묻어버릴 것을 건의했다.

박혁거세는 그 신하의 말을 옳게 여기고 금척을 땅에 묻게 했다. 그리고 후일 누군가 파내어 갈 수 있을 것을 염려해 금자를 묻은 주변에 60여 기의 봉분을 더 만들게 하여 찾을 수 없게 했다.

얼마 후 한나라의 사신이 방문해 금자를 빌려 달라고 했다. 혁거세는 “이웃나라에서 금자를 잠깐 빌려 달라시니 어찌 안 된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금자를 도둑맞을까 두려워 땅에 묻고 주변에 큰 무덤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무덤을 만든 사람이 죽어 어느 무덤에 금자가 있는지 아무도 몰라 빌려드릴 수가 없게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한나라 사신은 무덤을 모두 파보면 될 것이 아니냐고 되물었지만 거대한 무덤들이 있는 곳을 둘러보고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화를 내면서 돌아가버렸다. 그리고 박혁거세도 죽고, 무덤을 조성했던 사람들도 모두 죽어 금척이 어느 무덤에 묻혀있는지 영원한 비밀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경주 금척리 고분군 어디에 금자가 묻혀 있을 것이라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2.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대한민국의 문화유산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고분에 묻혀 있는 금관을 비롯한 화려한 예술작품과 같은 유물에 집착하며 고분을 발굴하는데 다양한 이유를 들어 문화유적을 훼손했다.

거대한 50여 기의 봉분이 밀집해 있는 금척리 고분군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발굴을 시도했다. 일인들은 조직적으로 발굴단을 꾸려 금척리 고분군 발굴에 나서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이어 발굴을 시도하려는 날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해 1주일이나 그치지 않아 대부분의 봉분이 절반이나 잠길 정도로 홍수가 졌다.

일본 발굴단은 이런 홍수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고 발굴을 그만두라는 신의 게시라고 믿고 완전히 철수했다. 그리고 금척리 고분군에 대한 발굴은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 금척리 고분군 서쪽의 가장 큰 쌍분 전경.
▲ 금척리 고분군 서쪽의 가장 큰 쌍분 전경.

 

 

◆흔적 : 금척리 고분군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일대에 30여 기의 고분이 경주에서 영천으로 이어지는 4번 국도를 가운데 두고 밀집해 있다. 금척리 고분군으로 사적 43호로 지정해 관리되고 있다.

금척리 고분군은 신라시대 초기에 조성된 고분군으로 추정된다. 현재 외형은 30여 기로 남아 있지만 조사에서 52기의 고분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드러나지 않은 고분과 외형으로 경계를 확산하면 60여 기의 고분군으로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일제강점기에 도로를 건설하면서 유물이 드러나 조사를 진행해 토기류를 발굴하고, 적석총의 구조를 확인했다. 일본인들은 세 차례나 고분에 대한 발굴조사를 하고도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지 않고 역사문화유적을 훼손했다.

해방 이후 도로확장공사를 위해 1952년 처음 조사를 실시해 세환이식, 곡옥, 호박환옥, 토기파편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적석목곽분의 고분구조를 확인했다. 이어 1975년과 1976년, 1981년에 도로공사, 간이상수도 공사 등으로 발굴조사를 벌여 토기류와 금속공예품, 무기류, 마구류, 공구류 등의 다양한 유물이 조사됐다. 또 삼국시대 초기의 목곽묘의 구조도 확인해 금척리 고분군은 4세기부터 조성된 고분군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후 2008년과 2018년, 2021년 금척리 고분군 일대에 대한 현황조사 등에서 적석목곽묘와 석곽묘, 목곽묘 등의 분묘를 확인하고, 고분군의 사적범위 확대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했다.

금척리 일대는 신라시대 모량부가 위치했던 지역으로 서라벌 중심지 신라왕족들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상당한 권력 지배계층이 머물렀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 금척리 고분군 북쪽 마을에 살았던 고 이근식 시인의 시비.
▲ 금척리 고분군 북쪽 마을에 살았던 고 이근식 시인의 시비.

 

 

◆스토리텔링: 금척리고분의 금기

금척리 고분군은 함부로 훼손하면 천벌을 받는다는 속설이 비밀 아닌 비밀로 경주지역에는 공공연한 소문으로 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경주지역 고분에서 금관과 금귀걸이, 목걸이, 환두대도, 금제허리띠 등의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고적조사단을 꾸려 본격적인 고분 발굴작업을 전개했다.

1909년 세키노 다다시는 고적조사단의 단장이 되어 30명의 전문인력으로 팀을 구성해 경주를 비롯한 3개 지역에 조사단을 파견했다. 다다시는 경주 조사단장이 되어 시가지 고분에 대해 연번을 부여하고 분포지도를 그려가며 세밀하게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에 이어 다다시는 호우총, 금령총, 마총, 검총, 은령총 등등 고분발굴작업에 혈안이 됐다.

다다시는 화려한 예술작품과 같은 금속공예품들이 쏟아지자 욕심이 동해 개인적으로 금척리 고분군을 도굴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국가적인 고분조사단 외에 비밀리에 20명의 도굴단을 꾸려 금척이 묻혀 있다는 전설의 금척리 고분군을 발굴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는 조선총독부에는 비밀로 부친 순수한 개인적인 욕심에서 추진하는 도굴이었다. 이 때문에 다다시는 경주시가지 조사단의 숙소 외에 금척리 민가에 별도로 도굴단이 묵는 숙소를 정해두고 밤을 이용해 도굴을 감행하기로 했다.

▲ 도로 서쪽 고분군의 남쪽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고목.
▲ 도로 서쪽 고분군의 남쪽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고목.

 

다다시는 과감했다. 민가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전문적인 인부 20명을 골라 짧은 시간에 보물들을 끄집어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추진했다. 그는 소리소문 없이 늦은 밤시간을 택해 작업을 벌이기로 했다. 인부들은 며칠동안 소와 돼지를 잡아 거나하게 잔치를 벌이며 힘을 돋우었다.

인부들은 달도 없는 그믐밤을 택해 5인 1조로 편성해 4기의 고분을 동시에 파들어가기로 했다. 거사를 시작하는 날, 다다시는 경주시가지의 발굴작업을 서둘러 마무리 하고 금척으로 날아왔다. 도굴꾼들에게 다시 작업에 대한 주의사항을 세세하게 설명하고 본인도 스스로 곡괭이를 잡고 현장으로 진입했다.

▲ 금척리 고분군 곳곳에는 듬성듬성 고목이 서 있다.
▲ 금척리 고분군 곳곳에는 듬성듬성 고목이 서 있다.

 

하늘은 무심치 않았다. 다다시 일행이 삽과 곡괭이로 고분을 파헤치려는 순간 우레와 같은 천둥번개가 치면서 소나기가 물폭탄으로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다다시는 오히려 작업하기 좋은 환경이라며 인부들을 독려했다. 그러던 찰나 다다시의 바로 오른쪽에서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작업하던 인부 하나가 건너편 고분까지 날아가 고꾸라져버렸다. 달려가 보니 인부의 전신이 까맣게 타버렸다. 즉사였다. 벼락을 맞은 것이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을 가까스로 추스린 다다시는 인부들을 불러 모아 일단 작업을 중단시키고 시신을 급하게 수습했다.

숙소로 돌아온 다다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비는 그 다음날도, 그 다음 다음날도 계속해서 퍼부었다. 1주일이나 쏟아지는 장마로 변해 고분군 일대는 물바다가 되어버렸다. 숙소에도 물이 들어와 장비조차 둥둥 떠내려가버렸다. 고분의 허리까지 물이 차올라 발굴은 엄두도 못내게 되었다.

▲ 금척리 고분군의 도로 서쪽 봉분 앞에 서있는 소나무.
▲ 금척리 고분군의 도로 서쪽 봉분 앞에 서있는 소나무.

 

다다시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분명 신이 발굴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게시일 것이라고 생각하자 겁이 덜컥 났다. 다다시는 많은 발굴 경험을 통해 신의 저주가 있는 곳은 절대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다. 다다시는 작업단원들을 불러 일일이 금일봉을 쥐어주면서 입단속을 당부하고는 도굴단을 해체하고 조용히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비밀리에 해체될 뻔했던 금척리 고분군은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로 인해 봉변을 면하고 2천년의 세월이 지나는 지금까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이 글은 문화산업화를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일반 기록물 또는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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