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베트남 밸리’ 물밑 지원⋯봉화에서 세계로
봉화군은 12세기부터 이어온 베트남과의 깊은 역사적 인연을 바탕으로 ‘K-베트남 밸리’ 조성사업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의 물밑 지원자로 알려진 인물이 바로 박영준 안세재단 이사장이다. 고려대 법학과 출신으로 대우그룹과 이명박 정부 핵심 관료를 거쳐, 국제협력 전문가로 자리 잡은 그는 최근 영국 킹스턴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으며 또 한 번 주목받았다.
최근 서울 용산에서 박 이사장을 만나 봉화와 베트남의 교류, 그리고 그가 꿈꾸는 저출산시대 한국 다문화사회의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오랜만이다. 근황부터 말씀해 주신다면.
▲디지털 지능지수(DQ) 창시자인 박유현 박사와 의기투합해 국가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뜻에서 3년 전부터 기획재정부 산하 공익법인인 안세재단을 맡고 있다. 대우그룹에서 김우중 회장을 모시고 9년, 이후 국회에서 기업인 출신인 이상득 의원과 11년을 함께했다. CEO 출신 지도자인 이명박 대통령도 서울시장 시절부터 인연을 이어왔다.
제 인생은 늘 ‘기업’과 함께였고, 지금도 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되고 국민이 행복하다고 본다. 중소·중견기업이나 스타트업이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일, 그리고 AI 시대에 부합하는 공익적 지원이 저의 목표이다.
-‘K-베트남 밸리’ 프로젝트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나.
▲사실 베트남의 국가 전략적 가치에 주목한 지 오래됐다. 김우중 회장께서도 개혁·개방기에 베트남 정부에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고, 지금도 베트남 사회에서는 그를 ‘경제 스승’으로 기억한다. 저 역시 2010년 당시 지식경제부 2차관으로 하노이에서 열린 한-베 경제협력위원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며 인연을 맺었고, 이후 호치민 응우옌떤탄대학교 자문위원장, 한양대에서 베트남 ODA 연구로 박사학위, 그리고 호치민경제대 명예박사학위와 명예학장직까지 받거나 맡았다.
2022년에는 국립 호치민경제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동 대학의 기술디자인대 명예학장으로 취임한 바 있다. 이런 ‘베트남통’ 이력을 알고 계시던 박현국 봉화군수께서 찾아오셔서 봉화와 베트남에 얽힌 역사를 설명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박 군수님의 설명을 듣고 적극 나서게 되었다.
-‘K-베트남 밸리’ 사업은 어떻게 진행되나.
▲2023년부터 2033년까지 10년간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 일대에 약 2천억 원을 들여 조성된다. 리(Ly) 왕조 후손들의 유적지, 한-베 역사문화체험관, 다문화국제학교, 진로연계센터 등으로 구성돼 양국 교류의 거점이자 다문화 상생의 상징적 공간이 될 예정이다.
-앞서 박 군수께서 봉화와 베트남의 오랜 역사를 설명하셨다고 했는데, 어떤 역사인가.
▲두 지역의 인연은 800여 년 전,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트남 리 왕조의 6대손 이용상이 정란을 피해 고려로 망명했고, 고려가 정착을 도와 ‘화산 이씨’ 성을 내렸다. 후손들은 안동과 봉화 일원에 뿌리내렸고, 13세손 이장발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19세의 나이로 참전해 문경새재전투에서 전사했다.
근데 그 시신을 수습하다 보니까 이장발의 가슴에 피 묻은 오언절구 유언장이 발견됐다고 한다. 전장에 싸우러 나가는 젊은 가장의 비장함이 쓰여 있는 명문이다. 그것을 보고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선생 가문에서 봉화 봉성면에 그를 기리는 사당과 비석을 세웠다. 이 얘기를 듣는 순간 전율이 느껴졌다. 봉화의 이 유적지는 리 왕조 후손들의 정체성과 한국의 포용을 함께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가 지역에 가져올 변화는 무엇이라고 보나.
▲지난 8월 베트남 권력서열 1위인 또 럼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이 방한했을 때, 양국 정상회담의 주요 화제 중 하나가 바로 이 ‘베트남 밸리’였다. 양국 정상회담 만찬장에서는 모든 식재료가 봉화군에서 올라왔다. 경주 APEC에서는 베트남 국가주석이 봉화군수 및 관계자들과 행사도 가졌다.
주말이면 전국의 베트남 이주민 노동자들이 버스를 대절해 봉화에 온다. 특히 베트남 이주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부자민’이라는 커뮤니티가 있는데, 제가 처음 봉화 유적지 답사를 갈 때 함께한 루이엔 박사가 주도하고 있다. 봉화에서 행사가 열리면 그들이 대규모로 가서 자원봉사를 하고, 주말이면 가서 안내도 맡는다.
그것이 봉화군과 연결돼 있다. 루이엔 박사는 놀랍게도 이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본인의 주민등록을 봉화로 옮겼다. 집도 구해 살고 있다. 일주일의 절반은 서울, 절반은 거기서 사는데 그 여성을 따라 4가구 정도가 이주를 했다. 궁극적으로 관광 목적뿐만 아니라, 봉화를 정착지로 만들려는 것이다. 대한민국 가장 최악의 인구 감소지역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 결국 우리가 다문화사회로 갈 수밖에 없고 다문화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봉화를 다문화의 미래모델로 만드는 것이 루이엔 박사와 저의 꿈이다.
다문화학교를 세워 교육을 잘 시켜서 ‘하버드 보내자’ 이거다. 그러면 다른 소외지역에도 희망이 될 수 있고, 경북도 입장에서 볼 때도 다문화가정이 많은데 미리 준비해야 될 것을 봉화에서 제도·행정적으로 해보자는 것이다. 경북도는 연구원을 동원해 도와주고 있고, 경북도교육청도 관심이 생겨 다문화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모델을 생각하고 있다.
-‘다문화 모델 도시’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그렇다. 봉화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가장 심각한 지역 중 하나인데,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다문화 정착과 교육을 통한 지역재생 모델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앞으로 봉화가 경북의,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다문화 미래를 보여주는 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적으로도 의미가 매우 크다.
▲봉화군 단위의 프로젝트지만, 그 비전은 매우 크다. 한국의 미래 난제인 인구 감소와 다문화사회 전환을 미리 준비하는 선제적 사례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관광지 몇 곳을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다. 봉화가 대한민국 다문화 공존의 실험도시가 되고, 그것이 세계로 확산되면 국가 브랜드가 한 단계 높아질 것이다. 봉화군, 경북도, 중앙정부가 같은 목표를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영국 킹스턴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시나.
▲킹스턴대학교가 제게 ‘공공리더십과 국제 교육협력, 미래인재 양성’의 공로를 인정해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수상 소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국제적 도전은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이번 명예박사학위는 더 많은 다리(bridge)를 놓으라는 격려의 의미라고 받아들인다. 이미 베트남에서도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는데, 이번에는 영국이라는 다른 문화권의 인정을 통해 글로벌 교류의 사명을 한층 무겁게 느끼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을 들려 주신다면.
▲AI 세상에서 우리는 지식 만으로 충분치 않다. 윤리적 판단, 창의성, 협업, 그리고 글로벌 시야가 함께해야 한다. 한국과 영국, 그리고 더 넓게는 아시아가 교육과 협력의 다리를 통해 상호 발전하도록 힘쓰고 싶다. 봉화의 ‘K-베트남 밸리’가 그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
-끝으로 봉화군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경북과 봉화는 지리적으로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역사와 전통이 살아 있는 지역이다. 인구 감소라는 위기도 있는데, 그 돌파가 국내적으로 해결이 안 된다. 글로벌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그런데 베트남은 역사적 뿌리가 있고, 우리와 문화적으로도 동일한 유교문화권이다. 그리고 근면한 국민성과 산업 성장 잠재력이 있다. 또한 1만여 개의 한국 기업이 베트남에 진출해 있고, 30만여 명의 양국 국민이 서로의 나라에 지내는 등 우호적인 이런 나라를 과감하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봉화군이 다문화사회의 선도지역으로서 새로운 도약을 만들어간다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경북도, 봉화군, 지역주민, 도의회 등 우리 경북의 지도자들이 한국 미래의 문제를 경북과 봉화에서 해결해 세계적인 모델로 만들면 새로운 도약이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상훈 기자 hksa707@idaegu.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