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김정숙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부모님께서는 대전 현충원에 계신다. 어머니를 아버지 곁에 모신 첫해 성묘였다. 동생네보다 내가 먼저 도착했기에 꽃을 갈아드리고 그 옆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우리 묘를 비켜 두 줄 앞에 꽃이 없는 묘가 눈에 띄었다. 묘비에는, ‘1952년 11월 13일 금화지구에서 전사한 육군 이등 중사 〇〇〇’라고 쓰여 있었다. 아버지가 2003년에 돌아가셨는데, 같은 해 안장된 분이다. 전사한 지 50년도 더 지난 후에 유해가 발굴된 모양이다.

6·25 전사자면 결혼 전이었을 수 있다. 부모는 이제는 아들 보러오기에 몸이나 시간이 자유롭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그날 조화와 생화를 준비했었는데, 아버지께 생화는 다음에 드리겠다고 하고, 그분 비 위에 얹어놓았다. 동생네가 도착했을 때 조카에게 내가 못 오거나 혹은 조카가 꽃을 사게 될 때는 그분 꽃도 사도록 부탁했다.

금화지구 저격능선 전투는 1952년 10월 14일부터 42일간 국군 제2사단이 중공군 제15군과 맞서 주 저항선 전방의 전초진지를 빼앗기 위해 공방전을 벌인 싸움이다. 특히 중공군의 반격이 끈질기게 이어져 11월 11일부터 1주일 동안에는 세 차례나 주인이 바뀌었다가, 11월 18일을 고비로 이 고지를 국군이 확보하게 되었다. 이 전투는 11월 24일에 종결되었다. 그의 가족은 이 전투 막바지에 전사한 그를 평생 자랑으로 여기게끔 위로받았는지 묻고 싶다.

우리 주변에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랑’이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구시 수성구 시지동 천을산에서 일반 등산로와는 다른 편 가, 바로 고산초등학교 뒤편쯤에서 ‘생뚱맞은(?)’ 비석 하나와 마주친다. 잘 다듬은 2단의 기단 위에 전혀 전혀 손대지 않은 자연석이 놓여 있는데 기단까지 합해서 2m 채 안된다. 중앙에는 “이곳에서 자랐다”는 표제가 있다. 기단에 네개의 검은 푯돌을 박았는데, 정면 푯돌 위에는 건립자와 건립시기, 뒷면에는 사연을 적어 놓았다. 양쪽면은 기리는 대상자 명단이다. ‘육군공병 5기 6·25 참전기념비’이다.

그러니까 낙동강 전투가 한창일 무렵, 고산초등학교는 제301 공병교육대의 군사훈련 장소로 사용되었다. 공병은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에 도로나 교량을 파괴하거나 놓거나 하는 군인이다. 즉 긴급한 전쟁 지원을 위해 고속 훈련을 마치고 전선에 보내는 때였다. 이때 ‘젊은이’(아직 덜 자랐을지도 모르는) 174명이 간부후보생으로 ‘자진 입대’했다. 이들은 1950년 10월 27일 소위로 임관하여 최일선 부대에 배치되어 전쟁을 담당했다. 몇 명이 생존했을까?

그런데 이 장한 뜻을 기린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었다. 14년 후 이 장소에 육군공병 5기 동기생회에서 이 기념비를 건립했다. 그리고 임관 50주년인 2000년 같은 날에 기념비를 재정비했고, 2011년 6월 8일에서야 이 기념물이 국가보훈처로부터 현충시설로 지정받았다. 그 뒤부터 6·25전쟁 참전용사들과 공병전우회, 무공수훈자회, 수성구청 관계자들이 함께 참배식을 한다. 그런데 왜 이 행사는 관련자들만 모여서 남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걸까? 왜 이 기념물은 고산 초등학교 입구나 마당에 세우면 안되는걸까?

전쟁 희생자의 탑이 산속이나 외딴 장소에 있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 전쟁 현장에 기념비를 세운다지만 그들을 기념하는 사람들은 살아서 생활하는 우리들이다. 현충될 분들을 우리 생활 속에서 기억해야 한다. 의병으로 나갔던 분이 살았던 집에는 그 사연을 적은 문패를 달거나, 나라를 위해 희생된 졸업생이나 재학생 명단을 학교 벽에 새겨 기억하는 일도 필요하다. 로터리마다 나라를 지킨 애국자를 마주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은 이 사회의 긍지이며 ‘존경의 대상’이어야 한다. 목숨을 바친 사람을 기억하는 일은 목숨을 바칠 용기를 얻는 길이다.

김정숙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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