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지 전 경남대 교수 / 경남대 고운학연구소 연구원

친구들과 밴드를 시작한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나이가 들어서 시작해서 그런지 욕심만큼 실력이 늘지는 않는다. 다만 즐기고 노력하는 만큼 조금씩 악기와 가까워지고 연주도 덜 불안해지고 있다. 그러면서 시간과 더불어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도 품고 있다.

연주할 노래에 맞추어 여러 가지 드럼 주법을 배우는데, 최근에는 1967년에 발표되었던 가수 정훈희의 노래, ‘안개’의 연주법을 익혔다. 몇 년 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가수 송창식과 듀엣으로 불러 재조명을 받았던 곡이다. 유튜브를 틀어놓고 노래에 맞추어 드럼을 두드리니 영화 장면들이 파노라마로 내 앞에 펼쳐졌다.

감독은 영화 속 인물들의 마음과 그들이 처한 상황을 안개라는 시각적, 청각적 장치로 전달하고 있었다. 중요 장면마다 안개는 나타났다 걷히기를 반복했으며 ‘안개’ 노래도 계속 우리 귀에 들리게 장치해 두었기 때문이다. 형사와 범인으로 만나 서로에게 빠져드는 두 남녀의 마음 탐색이 모호한 안개 같았고, 누구에게도 들키지 말아야 할 그들의 사랑을 타인들과 차단이라도 해주려는 듯 안개는 그들을 싸안고 있기도 하다. 안개는 영화 내내 그 미스테리한 사랑의 심로를 눈으로 또 귀로 절절하게 따라가도록 만들었다.

지독히도 미결사건에 집착하는 형사에게 영원한 미결 사건으로 남으려는 여인은, 바닷가 모래밭에 스스로 자신을 파묻고 영원히 찾을 수 없게 그래서 떨쳐낼 수 없는 미결 사건 즉 영원한 사랑으로 남기를 결심한다. 밀려오는 파도에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는, 잔혹하지만 아름다웠던 엔딩은 오래 나의 머리에도 남아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헤어질 결심을 한 그녀의 행로이다.

그런 ‘헤어질 결심’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대부분 우리의 헤어질 결심은 사랑이 끝나서, 인연이 끝나서이다. 인연으로 서로를 마음에 담지 않았던들 무심히 돌아서고 말지, 구태여 헤어질 결심을 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속을 까맣게 태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함께 한 오랜 시간이 아깝고 억울한 것이지 사람이 아깝지 않은 순간이 된 것이다. 배려에는 무례로, 관심에는 무심함으로 답하며 나의 호의를 이용하여 나를 호구로 만드니 말이다. 인연을 이어가려고 애쓰는 나를 오히려 만만하게 여겨 습관인 듯 뻔뻔함을 들이밀고 있다.

처음엔 몰라서 그랬거니 싶어 변명과 이해를 해주다가 점점 존중과 아낌은 물론이고 진심조차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그 상처와 억울함으로 곁을 내어준 자신마저 자책하기에 이르게 된다. 열등감을 무기 삼아 막무가내로 찔러보는 꼬챙이를 더는 참지 못하게 될 때 그때 결심을 하는 것이다. 바뀌지 않고 반복될 것을 알기에 결국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이러한 헤어질 결심으로 마음이 몹시 심란한 두 친구를 만났다. 그들에게 얼마 전에 읽은 세르반테스의 말을 전해주고 싶다. 섬의 영주 역할을 맡게 된 산초 판사에게 우리의 행동가 돈키호테가 주는 일종의 통치 가이드인 셈이다. “체형으로 벌해야 할 사람을 말로써 학대하지 말게.”라고. 손해가 발생했으면 단호하게 갚도록 하고, 잘못을 응징하라는 뜻이다. 감정에 사로잡혀 이런저런 설명과 이해를 구하느라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느끼게 하지는 말라는 뜻이다. 무심하고 담담하게 그리고 공정하게 헤어질 결심을 실행하라는 것 같다.

‘안개’ 노래 때문인지 헤어질 결심으로 마음이 복잡한 친구들의 감정이 나를 흔들어서인지 내 드럼 박자도 정박 사수가 어렵다. 오늘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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