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봄 구마모토 공항의 체류형 게이트 라운지에서 탑승을 기다리며 한참을 보낸 적이 있다. 공주 옷을 입은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귀여운 여자애가 앙증맞은 손으로 게임기에 동전을 넣고 자기를 닮은 예쁜 인형을 하나 꺼내고 있었다. 젊은 부부는 그런 일이 익숙한 듯 멀찍하니 서서 보고만 있었다.내 눈에는 수백 대나 되어 보이는 게임기 중에서 하나를 찾고 거기서 인형을 뽑아가는 행동이 참으로 대단하게도 보였고 한편으로는 ‘벌써?’라는 느낌도 있었다. 알아보니 32평인 그 대기실에는 서른한 개의 게임기, 특히 크레인이 있는 인형 뽑기 게
지난 주말 일본을 다녀왔다. 남편의 초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위해 모은 돈의 일부를 꺼내어 코로나 이후의 첫 해외 나들이를 한 것이다. 네 부부 즉 8명의 적지 않은 인원이 움직이는 거라 자유여행이나 패키지여행 등 다양한 여행형태를 고려해보았으나 결국 이제껏 그래왔듯이 우리 일행만으로 구성된 맞춤형 여행을 하게 되었다.우리 부부가 참석하지 못했던 지난 일본여행 이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몇몇 회원들의 “단무지가 제일 맛있었다.”라는 음식평을 거의 7년간 들어왔기 때문에 순전히 여행사에만 의존하여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여행은 피해
삶은 매일 우리를 두 갈래 길 위에 서게 한다. 아니 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선택하겠느냐고? “때문에”라는 길을 택할지 아니면 “덕분에”라는 길을 택할지. 둘 다 일어난 일에 대한 원인을 설명하는 표현이긴 하지만 그 접근법은 완전히 다른 것 같다.나의 부족 ‘때문에’ 실패한 진실을 부인하라는 말은 아니다. “때문에”도 당연히 있어야 하고 원인분석 또한 냉철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얼마든지 우리는 같은 밑그림에도 다른 색깔을 칠할 자유를 가지고 있고 그 자유를 행사하여 따뜻한 그림으로도 만들 수 있다.뒤돌아보면 누구나 “
우리가 잘 아는 어느 개그맨에게 후배가 물었다. “어떻게 형님은 화를 잘 안 낼 수가 있나요?”라고. 그 대답이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누가 나에게 잘못을 저지르거나 심한 손해를 끼쳤을 때, 내가 화를 못 참아 소리를 지르면, 상대방은 마땅히 할 사과나 보상 혹은 책임을 지는 대신 내가 화낸 것으로 그걸 퉁쳐 버리더군.” 했다.그러니 감정을 못 이겨 화를 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도 하고 손해를 보는 일이기도 하다. 소리를 지르거나 인상을 찌푸리거나 거친 표현을 쏟아내는 작은 형태의 폭력은 감정을 해소할 수는 있으나 받아야
“행복해지려면 ‘식세기’를 사세요.”라는 ‘클릭베이트(clickbait)’ 즉 ‘낚시성 제목’에 낚여 행복과 관련된 동영상을 본 적 있다. 나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시간이 없다거나 할 일이 많다고 불평하지 말고, 남녀평등을 소리 높여 외치지도 말고, 차라리 돈을 들여 식기 세척기를 사라는 것이다. 귀찮고 싫은 일은 가능한 가전 제품에게 떠맡기고 그 시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더 실리적이라고 했다.필수품이 되어버린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 정도는 누구나 다 누리는 디폴트 행복값이 되어버렸으니 식
가끔 어디에 뒀나 싶어 물건을 찾다가 옷장이나 서랍을 강제로 정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몇 년 전 어느 리조트 기념품 가게에서 딸이 사준 하얀 꽃 모양의 커다란 머리핀을 찾았고, 어머니가 직접 만들고 수를 놓은 모시 저고리도 찾았다. 유품 정리를 하다, 이 옷을 입고 환하게 웃던 어머니 모습이 하도 생생해서 챙겨온 옷이었다. 며느리가 사준 개량 한복 바지까지 모시 저고리 밑에 받쳐 입고 외출을 했다. 친구가 선물해준 까슬까슬한 여름 모시 소재의 긴 스카프를 하얀 머리핀으로 살짝 고정도 시켰다. 날이 덥기도 했지만, 아래위로 내가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표현인 ‘국뽕이 차오른다.’라는 그 희열을 요즈음 내가 느끼고 있다. 영화관에서 「King of Kings」를 보고, 넷플릭스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오징어 게임」을 보고, 유튜브에서 BTS와 GD의 해외공연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그들과 같은 조상을 가졌고, 그들과 같은 나라에 살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문화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Korea라는 나라의 국민, 즉 그들과 같은 K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진한 자부심을 느끼기 때문이다.우리나라의 모든 문화 요소 앞에 ‘Korea’의 ‘K’를 따서 K-드라마
요즈음 나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서 공통된 아침 루틴을 발견한다. 눈을 뜨자마자 바로 머리맡의 핸드폰을 켜는 것이다. 알람 해제를 위해서거나, 시간을 확인하거나, 밤사이에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어젯밤 잠들고 난 후 들어온 카톡은 없는지, 이런저런 이유로 핸드폰을 켠다고 한다. 나도 그런 이유로 핸드폰을 켜서는 잠들기 전 듣던 유튜브를 볼 때가 더러 있다.그나마 아침 식사를 위해 핸드폰과 멀어질 수 있는 것은 다행이다. 더욱 다행이라 여기는 것은 남편이 출근한 후 한 시간 반 정도를 텃밭과 정원 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텃밭을
오랜 기간 독신 연예인들의 삶을 보여주는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은 네 살이나 다섯 살 된 어린아이들의 사생활까지 TV로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어릴 때는 다 귀엽고 이쁜지라, 채널을 자주 바꾸는 남편도 그 아이들 앞에서는 무장해제가 되는 모양이다. 한동안 ‘푸바오’ 앓이를 했던 나도 똘똘한 아기들을 보면서 그 속상했던 마음을 달래게 되었다.말씨나 행동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영리하고 당찬 이 아이들은 예의까지 발라 어른들께 배꼽 인사를 하느라 두 손을 배에 올리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예쁜
요즈음 내가 책을 보거나 글을 쓰기 위해 즐겨 앉는 자리는 식탁 옆 작은 이동식 테이블 앞이다. 나는 이 이동식 작은 테이블을 온 집안 곳곳으로 옮겨 놓으며, 철마다 특정 장소를 나의 시절 인연으로 택하고 있는데, 봄이 되면서부터는 밖의 잔디와 꽃이 보이는 이곳을 나의 장소로 택했다. 조리대와 싱크대를 등지고 식탁에 앉듯 넓은 창을 마주하여 앉으면 비록 부엌 공간을 벗어나진 못했어도 아늑한 카페에 앉은 듯 편안하다.다른 집들과 경계를 이루는 돌담도 보이고 길도 보이는데, 하루에 한두 번 정도는 이웃들이 지나가는 것을 관심과 애정으로
어떤 사람에 대해 “참 계산적이다.”라고 한다면 호감이 있다거나 좋아한다는 뜻은 확실히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돈이든 시간이든 지나침과 모자람이 없도록 밸런스를 잘 유지한다는 좋은 의미도 있겠지만, 항상 머리를 굴려 계산을 하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므로.그런 말을 혹시라도 듣게 된다면 항의나 억울함을 호소할 것이다. 본인도 순수하고 무모하고 때로는 어리석기도 한 선택을 하여 속이 상할 때가 많은데, 어찌 몇 번의 모습으로 혹은 겉으로 보이는 면만 보고 그런 말로 판단할까 싶을 것이
친구들과 모임을 정하려고 약속 날짜를 표시하다 ‘우리는 어떤 약속을 하며 살고 있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진 않았지만, 꼭 지켜야 하는 약속과 강제력이나 구속력이 약해 지키지 않아도 큰 탈이나 부담이 없는 약속으로 크게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선거를 며칠 앞둔 후보들의 약속은 꼭 지켜져야 할 약속이다. 그 약속이 지켜질 것으로 믿어서 유권자들이 그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공적인 약속이 공허한 약속이 되는 많은 경우를 경험했으면서도 우리는 약속이란 지켜야 하는 것으로 믿는다. 정치적 공약은 내쳐두더라도
바람 부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코를 찔찔 흘리며 만났던 7살 어린이들은 그 나이 앞에 숫자 6을 추가한 지금에도 만나기만 하면 얼굴 가득 환한 미소는 물론이고 “야”로 서로를 불러가며 잠시 떨어져 있었던 근황 나누기에 순서를 다툰다. 나는 그런 철없는 남자들을 여럿 알고 있고 자주 만나고 있다. 남편과 그의 고향 친구들은 각자의 아내를 이 구성원에 추가했을 뿐 여전히 과거의 한 시점에 머물러 진행형으로 살고 있다. 이들의 끈끈한 우정은 수없이 많은 기억과 추억의 순간들로 깊어지고 만나는 모임의 회수만큼 확장되고 있다.전국으로 흩어져
들쑥날쑥하지만 나의 ‘용비어천가’ 이용은 6개월을 넘어서고 있다. ‘용이 날아올라 하늘을 다스린다.’라는 뜻인 이 거창한 이름을 사우나와 헬스 시설을 갖춘 목욕탕이 사용하고 있어서이다. 나이가 들어서는 무조건 근력을 키워야 한다며 자신의 시간까지 양보해준 친구의 진한 애정에 못 이기는 듯 운동을 시작했다. 이름 때문인지 이곳을 드나들 때마다 근력보다 세종대왕께 대한 내 관심과 존경심이 커지고 있다.훈민정음 창제 후 그 실용성과 활용성을 시험하기 위해 궁정 예식의 악장 즉 노래 형식으로 만든 이 용비어천가는 “해동(海東) 육룡(六龍)
며칠 전 자려고 누웠는데, 친구로부터 카톡이 날아왔다. 정채봉 시인의 「오늘」이란 시가 적혀 있었다. “꽃밭을 그냥 지나쳐 왔네/ 새소리에 무심히 응대하지 않았네~~”라는. 시 낭송 모임의 회원인 그녀가 요즈음 배우는 시라고 했다. 새소리에 무심했고, 하늘의 별도 세지 않았고, 친구의 신발도 챙겨주지 못해서 내가 나를 슬프게 했다는 그 시인의 마음이 친구의 마음을 통해 나에게로 왔다.응대이든 응답이든 받는 쪽의 기쁨이 더 크겠지만, 시인과 친구 그리고 나는 응답하는 사람에게 주목했다. 사람은 물론이고 자연에게도 응답하며 살아보자,
삶은 변화보다 지속이며, 그중에서도 변덕 부리지 않고 요동치지 않고 그저 꾸준하게 나아가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요즈음 하게 되었다. 그전엔, 살다 보면 높아지고, 넓어지고, 깊어지는 변화가 자연스럽게 내 삶에 찾아올 줄 알았고, 또 그런 변화를 애써 쫓다 보면 어느 순간엔 가시적이고도 구체적인 결과를 손에 잡게 될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하지만 다양한 매체를 통해 유명인사들의 인터뷰와 강연을 접하면서 이런 생각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이 이루어낸 세속적 출세나, 지적, 예술적 성공의 높이가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질서 있게 꾸준히 나
나이가 들면 저마다 하나씩 가진 기억의 창고에는 점점 더 많은 것이 쌓인다. 파일별로 라벨을 붙여 정리해두지도 않았고 칸칸이 서랍장을 만들어 넣어 두지도 않았으니, 필요한 기억 하나를 꺼내려면 어떻게 엮였는지도 모를 잡다한 것들이 연상작용이라는 이름으로 줄줄이 같이 따라 나오기도 한다.몽테뉴는 그런 현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정리가 잘 되어있지 않은 기억의 창고에서 뭔가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워 때로는 오류가, 때로는 왜곡이 일어난다고. 켜켜이 쌓인 기억과 추억의 저장고에서 때로는 엉뚱한 조각의 기억을 찾아오기도 하고, 때로는 옳
수동적으로 시청자를 앉혀놓는 TV보다 시청 시간과 장소를 마음대로 택할 수 있는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 매체가 더 대세인 요즘이다. 그러다 보니 제작 기간이 오래 걸리고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드는 장편의 드라마들은 OTT 플랫폼에 업로드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노력과 자본을 바탕으로 소비자의 숨은 욕구와 시대적 트렌드를 잘 반영해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회 이슈와도 잘 맞아야 흥행을 한다니 운도 따라야 하는 모양이다.에 이어 다시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는 에 요즈음 내 마음이 폭싹 빠져버렸다. ‘정말
친구들과 밴드를 시작한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나이가 들어서 시작해서 그런지 욕심만큼 실력이 늘지는 않는다. 다만 즐기고 노력하는 만큼 조금씩 악기와 가까워지고 연주도 덜 불안해지고 있다. 그러면서 시간과 더불어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도 품고 있다.연주할 노래에 맞추어 여러 가지 드럼 주법을 배우는데, 최근에는 1967년에 발표되었던 가수 정훈희의 노래, ‘안개’의 연주법을 익혔다. 몇 년 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가수 송창식과 듀엣으로 불러 재
다시 3월이다. 정년퇴임을 했는데도 개학 시기가 되니 기분이 묘하다. 지금쯤은 새로운 교재를 붙들고 어떻게 하면 재미있고 유익한 수업을 할 것인가 이런저런 궁리로 바빠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한가한 현실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인 모양이다. 출석부에 기재된 학과나 학년을 보며 전공과 영어를 어떻게 잘 연결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고 PPT를 만들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특별한 약속도 없고 몰아 보기를 해야 할 밀린 드라마도 없는 봄비 추적추적 내리는 이른 아침이다. 늦잠에도 익숙하지 않은지라 무엇을 할지 한참을 방황하다 첫 학기 첫 수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