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지 전 경남대 교수 / 경남대 고운학연구소 연구원

수동적으로 시청자를 앉혀놓는 TV보다 시청 시간과 장소를 마음대로 택할 수 있는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 매체가 더 대세인 요즘이다. 그러다 보니 제작 기간이 오래 걸리고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드는 장편의 드라마들은 OTT 플랫폼에 업로드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노력과 자본을 바탕으로 소비자의 숨은 욕구와 시대적 트렌드를 잘 반영해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회 이슈와도 잘 맞아야 흥행을 한다니 운도 따라야 하는 모양이다.

<오징어 게임>에 이어 다시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는 <폭싹 속았수다>에 요즈음 내 마음이 폭싹 빠져버렸다. ‘정말 수고가 많으셨다’라는 제주도 방언을 제목으로 택한 김원석 감독은 “조부모 세대, 부모님 세대에 대한 헌사, 자녀 세대에 대한 응원가”로 이 드라마를 기획했다고 한다. 힘든 시기를 까발리고 상처를 헤집어 보여주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응원을 한단다. 양말을 벗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박세리의 흰 발에 전 국민이 위로를 받았던 그 시대 만큼이나 진심 담긴 세련된 응원이 필요한 지금인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작 중 인물을 따라 눈물을 흘리고 목이 메어 아프기까지 하지만, 서러워서나 아파서가 아니라, 알게 되어서, 다시 느끼게 되어서, 따뜻한 위로를 받아서 울고 있음을 느낀다. 한 회가 끝날 때마다 마음은 더 뜨뜻해지고 그 시대를 거쳐 지금 이 따뜻한 시간이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깨닫게 된다.

어쩌면 저렇게도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 싶은 배우 염혜란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녀 자리에 나의 어머니를 앉혀본다. 죽을 둥 살 둥 악착같이 물질하는 해녀는 아니어도 우리 시대 어머니들은 다 그렇게 밥 한 톨도 아껴 자신의 입 대신 자식 입에 넣었지 않았던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도 호랑이 시어머니에게 당신 핏줄인 손녀딸 한 번만 도와주기를 죽음으로 약속받아내는 어머니이지 않던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고 살고있어도 엄마 품을 못 잊어 아침마다 산을 넘어오는 집착 같은 엄마 바라기를 외면하고 내칠 수 있는 엄마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정으로 한으로 엉켜 한 덩이로 살았던 모녀의 삶이 당차고 요망진 딸의 일생으로 점철되고, 그래도 그런 세월조차 약인 듯 버티면 그 삼대째의 자식을 겨우 서울로 유학시킬 수 있는 가난한 부모가 될 수 있던 시대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 속의 호랑이 시어머니는 나의 할머니이고 그 엄마는 나의 엄마이다. 그러면서 나는 엄마가 되고 엄마였던 나는 또 할머니가 되어 간다. 그렇게 철부지였어도 엄마가 되면 자기 자식을 거둘 줄 알았고, 그렇게 가난으로 나를 먹이고 입혔던 엄마가 싫었어도 환경이 나아지지 않으면 그 전철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 세월을 우리 어머니들이 살면 살아진다고 살아냈던 것이다.

당찬 손자며느리를 이기지 못하는 며느리를 향해 “네 며느리가 내 며느리보다 낫다.”던 어느 할머니는 나의 시어머니를 소환했다. 그렇게도 예뻐하는 손자와도 금을 긋고, “네 아들보다 내 아들이 더 예뻤다.”고 주장하셨던 40년 전의 시어머니를.

그 시어머니가 이제 구순을 넘겼다. 7남매 맏이인 장남과 결혼하여 가난한 교사 월급으로 그 동생들 교육까지 책임졌던 젊은 시절의 어머니는 “안 해본 것이 없다.”고 하셨다. 유치원 다니는 손자가 입고 온 초보 엄마의 뜨게 옷을 어루만지며 칭찬 대신 “너는 이런 것 안 했으면 좋겠다.”던 어머니가 그때는 서운했건만 세월이 지나 보니 나름의 사랑이었던가 싶어 눈시울이 뜨겁다. 오늘 어머니를 만나러 가서 두 손을 꼭 잡고 “어머니, 사는 내내 폭싹 속았수다”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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