켜켜이 쌓인 기억 창고, 때론 삐걱
서로의 조각을 맞춰보고 바꾸며
큰 그림 완성하는 게 이해력일 것
나이가 들면 저마다 하나씩 가진 기억의 창고에는 점점 더 많은 것이 쌓인다. 파일별로 라벨을 붙여 정리해두지도 않았고 칸칸이 서랍장을 만들어 넣어 두지도 않았으니, 필요한 기억 하나를 꺼내려면 어떻게 엮였는지도 모를 잡다한 것들이 연상작용이라는 이름으로 줄줄이 같이 따라 나오기도 한다.
몽테뉴는 그런 현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정리가 잘 되어있지 않은 기억의 창고에서 뭔가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워 때로는 오류가, 때로는 왜곡이 일어난다고. 켜켜이 쌓인 기억과 추억의 저장고에서 때로는 엉뚱한 조각의 기억을 찾아오기도 하고, 때로는 옳은 조각이라도 해석을 제 마음대로 한다는 뜻이리라. 몽테뉴 스타일의 오류와 왜곡이란 말 대신에 ‘기억력이 떨어진다’라는 좀 더 일반적이고도 자연스러운 표현을 우리는 흔히 사용한다.
과거를 기억하며 일어나는 오류와 왜곡은 다행일 수도 있다. 했던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잊는 것도 다반사이니 말이다. 며칠 전 아침을 먹고 늘 먹는 몇 개의 약 캡슐을 까서 식탁 위에 올려두고 온수와 냉수를 적당히 조절하여, 그 물의 온도에 만족하며 물 한잔을 다 마셨다. 그랬으니 응당 약도 복용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저런 일을 하고 30분이 훨씬 지난 후에 여전히 식탁 위에 놓여있는 알약을 발견했다.
큰 잘못도 아니고 큰 실수도 아닌 그 약 복용의 망각이 종일 나를 우울하게 했다. 단기기억의 상실이 치매의 전조 현상이라는 통념에 따라 나에게 그 현상이 일어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런 서글픈 얘기에 친구들은 오히려 신이 났다. 그런 일은 일상이라며. 잊지 않으려고 신발과 함께 둔 음식이 상한 이야기, 송금 중 전화를 받다가 ‘보내기’를 하지 않아 실수한 일이며, 외식 후 자신과 두 딸의 핸드폰까지 챙겨나오는 남편 보기가 무안했다는 얘기까지 실수와 망각의 에피소드가 끝없이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50년간 이어져 온 우리 인연에 대한 기억력 테스트가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기들이었다. 띄엄띄엄 있었던 예전 모임을 기록한 수첩을 들여다보며 그때의 에피소드에 관련해, 사람과 장소, 해프닝에 대한 기억들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오답과 억측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대학 시절의 1등이 기억력 테스트에서도 여전히 1등이었으니, 공부와 기억력의 상관관계는 확실하게 증명이 된 셈이다.
그렇게 수성못 벚꽃을 증인 삼아 오랜 친구들과 보낸 하루는 기억의 오류와 왜곡을 이기는 시간이 되었다. 과거 추억에 대해 각기 다른 조각을 간직하고 있던 친구들이 꺼내든 조각들은, ‘퍼즐 맞추기’를 통해 아름답고도 찬란한 한 장의 완성된 그림을 만들어내었다. 우리는 이해했다. 구태여 집단지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아도, ‘내 것’과 ‘네 것’이 합쳐져서 퍼즐 맞추기가 완성된다는 것을. 너와 내가 오래 만나 어울리는 ‘우리’가 되어있음을.
그런 깨달음이 나의 고정관념을 살짝 흔들었다. 나이가 들면 저하된 기억력의 보상인양 이해력은 확장된다고 믿었었다. 세월의 길이만큼, 지식과 경험이 많아진 만큼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더 알고 더 경험할수록 ‘내 말이 맞아!’라는 꼰대 의식과 고집이 같이 클 줄은 몰랐다.
이해력이라는 것이 내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하고 무르익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다른 조각들로 퍼즐을 맞추듯, 서로의 조각들을 이리저리 맞추어보고, 때론 서로 가진 조각을 바꾸어서 맞추기도 하면서 큰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 진짜 이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긴 세월 잘 살아준 친구들끼리 기억보다 이해로 더 가까이 다가간 향기로운 봄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