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창제 후 활용시험 위한 노래
건국 역사 짧은 왕조 정당 주장 서사시
많은 명문 덕 후대에 엄청난 영향 미쳐
들쑥날쑥하지만 나의 ‘용비어천가’ 이용은 6개월을 넘어서고 있다. ‘용이 날아올라 하늘을 다스린다.’라는 뜻인 이 거창한 이름을 사우나와 헬스 시설을 갖춘 목욕탕이 사용하고 있어서이다. 나이가 들어서는 무조건 근력을 키워야 한다며 자신의 시간까지 양보해준 친구의 진한 애정에 못 이기는 듯 운동을 시작했다. 이름 때문인지 이곳을 드나들 때마다 근력보다 세종대왕께 대한 내 관심과 존경심이 커지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후 그 실용성과 활용성을 시험하기 위해 궁정 예식의 악장 즉 노래 형식으로 만든 이 용비어천가는 “해동(海東) 육룡(六龍)이 나르샤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 쎄 /곶 됴코 여름 하나니~”로 시작된다. 어린 시절 교과서로 배워서 지금도 입에 뱅뱅거리는 이 시가는 세종의 이전 6대조 할아버지 왕들을 칭송하며 건국 역사가 짧은 조선왕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서사시이다. 그래서인지 서양 고전의 『아이네이스』를 떠올리게 된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으로 베르길리우스는 로마의 건국사를 신화로 승격시켰다. 트로이의 패전 장군 아이네이아스가 어머니 비너스의 도움으로 역경과 고난을 겪으며 이탈리아에 도달해 토착세력을 물리치고 로마라는 새로운 국가의 씨를 뿌렸다고 서술했다. 그 결과 신들의 후예가 된 로마시민들은 1453년 동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오래오래 자부심을 지녀왔었다.
라틴어로 글깨나 읽는다는 사람들은 마을마다 학교마다 비치된 이 건국의 서사시를 다 외우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래서 14세기 초의 단테도, 아버지를 만나러 지옥을 다녀온 아이네이아스를 글로 쓴 베르길리우스를 가이드 삼아 지옥과 연옥의 여행을 『신곡』으로 읊어내었다.
요즈음 프랜시스 베이컨의 『학문의 진보』를 읽으면서 이전에 읽었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떠올리며 내가 네 번째의 용비어천가를 만난 것을 알았다. 왕을 신격화하거나 건국에 미담을 추가하거나 정당성을 주장하는 우리나라와 로마의 경우와는 약간 다르지만, 자신이 모시는 왕이나 군주를 칭송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결이 같아 보여서이다.
그 시대의 사상가나 학자들은 왕이나 군주의 인정과 지지를 받아야만 자신의 철학이나 신념을 정치적으로 실행에 옮겨 볼 수 있었기에 승인과 결재를 할 왕과 군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들 개인에 대한 찬사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전쟁과 정치에 뛰어들 기회를 얻기 위해 메디치가의 군주에게 바치는 『군주론』을 작성했었다. 배이컨은 당시 영국의 왕인 엘리자베스 여왕과 뒤를 이은 제임스 왕에게 끊임없이 지식과 학문의 대계를 세우고 그 일을 수행할 일꾼인 자신에게 후견자가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 『학문의 진보』라는 이 상소문을 잘 읽어보고, 이 프로젝트를 밀어주면 이 나라의 백년대계, 천년대계를 이룰 것이라고 설득을 했다. 그들은 자신의 글을 읽게 될 보스에게, 왕의 성품은 물론이고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가진 분이라고 치켜세우면서 아부와 칭찬으로 러브콜을 진하게 날렸던 것이다.
스스로 용비어천가를 써서 바쳤던 두 사람은 바라던 목적을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지만 나 같은 사람조차 찾아 읽는 고전을 남기게 되었고, 수많은 명문과 뛰어난 지식으로 엄청난 영향을 후대에까지 미치게 된다. 나폴레옹은 마키아벨리의 책을 배게 밑에 둘 정도였으며 “아는 것이 힘”이라는 베이컨은 귀납적 추론과 현대과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나저나 부상과 여행으로 멈추고 있는 나의 ‘용비어천가’에 나도 좀 더 공을 들여 결실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