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이익에 따라 우선 순위 정하게 되면
당장은 불이익 없지만 손해 감수하게 돼
후보들, 약속 지키겠다는 약속 필요 시점

금동지 전 경남대 교수 / 경남대 고운학연구소 연구원

친구들과 모임을 정하려고 약속 날짜를 표시하다 ‘우리는 어떤 약속을 하며 살고 있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진 않았지만, 꼭 지켜야 하는 약속과 강제력이나 구속력이 약해 지키지 않아도 큰 탈이나 부담이 없는 약속으로 크게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선거를 며칠 앞둔 후보들의 약속은 꼭 지켜져야 할 약속이다. 그 약속이 지켜질 것으로 믿어서 유권자들이 그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공적인 약속이 공허한 약속이 되는 많은 경우를 경험했으면서도 우리는 약속이란 지켜야 하는 것으로 믿는다. 정치적 공약은 내쳐두더라도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우리 스스로가 약속을 지키려 애를 쓰며 살기 때문이다.

피로하고 우울해도 월요일이면 직장이나 학교로 향하고, 배달이나 납품과 같은 비즈니스 약속은 물론이고, 과제나 프로젝트도 마감 시간을 어기지 않으려고 용을 쓴다. 세금이나 카드 요금같이 강제로 부과된 날짜도 지켜내려고 신경을 바짝 쓴다. 이런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무책임하다는 질책은 물론 약속 불이행으로 인한 불이익과 페널티도 감수해야 하므로.

이보다 의무가 낮은 약속도 참으로 많다. 합의로 약속일을 정하는 소규모 사교 모임도 있고, 나의 의견이나 일정과는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초대를 받게 되는 동창회나 종교행사도 있다. 이런 모임은 더 급한 일, 더 중요한 일에 으레 자리를 양보하게 되고, 개인의 취향이나 이익에 따라 우선순위에서 밀리기도 한다.

당장 큰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약속을 계속 소홀히 대하는 사람은 결국 그만한 손해를 감수하게 된다. 뒷담화의 대상이 되거나 다음 초대나 모임에서 제외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계산은 오히려 사회적 고립을 자초하게도 하는 것 같다.

이행의 여부를 판단할 수 없는 약속들도 있다. 아프거나 슬프거나 함께 하겠다던 결혼서약은 유효기간을 계속 연장하며 이어가는 평생의 약속이다. 그러니 어떤 순간에 어떤 기준으로 약속의 의무가 잘 지켜지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까? 더구나 외부인이!

마지막으로 가장 의무도 없고 외부의 비판도 없는 약속, 내가 나에게 하는 약속에 내 생각이 도달했다. 더 부지런히 더 열심히 하겠다던 여러 가지 약속을 떠올렸다. 사회에 대한 약속, 다른 사람과의 약속, 실체도 없는 규정과의 약속에도 최선을 다하면서, 나에게 한 약속은 얼마나 가벼이 여기고 얼마나 쉽게 미루고 어겨왔던 가에 생각이 미쳤다. 풀과 꽃에게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킨 이도 있는데!

조경사 정영선 씨는 자신이 다녔던 대학교 뒷동산에 피어 있던 미나리아재비에게 약속을 했다고 한다. “내가 너를 잊지 않으마. 내가 앞으로 만드는 정원에 너를 많이 심어줄게. 네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할게.”라고.

그녀는 그 약속을 평생 지켜왔고,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이나 선유도는 그녀의 약속이 지켜진 그런 공간이었다. 습지를 좋아하고 축축한 땅을 좋아하는 이 미나리아재비는 개발과 더불어 거의 사라진 귀한 야생초로서 사람들이 잘 찾지도 않는 우리 고유의 식물이다. 그녀 덕분에 내세울 것 없는 이 귀한 생명은 그 이름을 보존하여 이 땅에 풍성히도 자리 잡았다. 오랜 시간을 들여 한 여인의 손끝에서 이루어진 약속의 결실이었다.

풀에도 꽃에도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켜낸 이를 생각하면, 쉽게 하고 쉽게 어긴 수많은 나와의 약속에 미안해지고, 지켜야 할 약속과 지키지 않아도 될 약속을 구분해보려던 내 짧은 생각에도 부끄러워진다. 약속을 지키겠다는 약속이 필요한 시점이다.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