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국건 정치평론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문시장을 찾기 전날 필자는 대구 정치권의 지인에게서 그 소식을 미리 귀띔받았다. 솔직히 믿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이 달성 보궐선거 출마로 정치에 입문한 1998년부터 오랫동안 취재했기에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을 지내고 이미 정치를 떠난 입장에서 누가 아무리 간청하더라도 마지못해 들어 줄 성품이 아니다. 원칙주의자답게 똑 부러지게 거절하는 게 박근혜 스타일이다.
정 도와주고 싶으면 서면이나 영상 메시지로 대신하면 된다. 유일하게 남은 측근인 유영하 의원이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했을 때의 지원이 딱 그 정도였다. 옥고를 치른 후 달성에 귀향해서도 꼭 필요한 외부 일정만 소화하고 있기에 이번 서문시장 방문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정치인 시절 어려움이 닥치면 찾아서 힘을 얻고 했던 서문시장에 정치를 떠난 그가 왜 갔을까. 보수의 상징인 그곳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뭐였을까.
박 전 대통령은 서문시장 방문이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후보 지원 행보임을 직접 밝혔다. 대구로 다시 온 뒤 서문시장을 꼭 찾고 싶었던 참에 얼마 전 김문수 후보의 동성로 유세 때 많은 분이 자신을 보고 싶어 했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해서 왔다고 했다.
마이크를 잡고 지원 연설은 하지 않았으나 김문수 후보의 선거용 붉은 상의를 착용한 지역 국회의원들과 함께 유권자를 만났다. 전직 대통령의 품위를 지키면서도 ‘김문수 지지’ 메시지를 확실히 전했다.
박 전 대통령은 무엇 때문에 본인의 평소 스타일과 다르게 선거 현장에 직접 달려갔을까. 유영하 의원을 비롯해 지역 국민의힘 의원들이 뿌리칠 수 없을 정도로 간청하는 바람에 마지못해서? 아니라고 본다. 본인 스스로 보수우파 후보 지원을 해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에 지지층 총결집의 상징적 장소인 서문시장에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나 그의 ‘애국심’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선친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부터 평생을 국가와 함께하는 삶을 살면서 굳어진 원칙이자 신념이다.
그런 애국심과 다선 국회의원을 거쳐 대통령을 지낸 정치적 감각이 합쳐지면서 이번 대선을 크게 걱정했을 걸로 보인다. 특히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집권했을 경우 생길 일을 따져보지 않았을까.
‘이재명 대통령’이 탄생했을 때 재판 지속 여부를 둘러싼 국가적 혼란을 예상했을 것이다. 또 ‘내란 종식’을 명분으로 하는 정치보복 가능성에 주목했을 수 있다. 이 대목은 박 전 대통령 본인이 탄핵 당한 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벌어진 일을 연상케 한다.
그때도 ‘적폐 청산’을 명분으로 정치보복이 이뤄졌다고 우파는 주장한다. 박 전 대통령 시각으론 이재명 정부 출범 시 예상되는 정치보복이 남의 일이 아닌 셈이다.
만일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면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주거나 좌파 성향 법안들이 거부권 행사 없이 줄줄이 통과된다. 지금 국회의 남은 임기 3년 동안 그런 일이 벌어지면 국가의 정체성이 흔들린다. 애국심 강한 박 전 대통령의 생각이 깊었을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 대한민국 정체성의 기본 틀을 만든 인물이 선친이다. 서문시장에 달려갈 충분한 명분들이다.
물론 박 전 대통령의 현장 행보가 김문수 후보의 득표에 얼마나 보탬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이날 ‘선거의 여왕’의 귀환을 보듯이 엄청난 인파에 둘러싸였다. 표로는 계산할 수 없는 묵직한 메시지가 이번 서문시장 방문에 담겨 있다. 국가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보수가 총결집해야 한다는 간절한 호소다. 유권자가 얼마나 호응할지는 별개 문제다.
송국건 정치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