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지 전 경남대 교수 / 경남대 고운학연구소 연구원

어떤 사람에 대해 “참 계산적이다.”라고 한다면 호감이 있다거나 좋아한다는 뜻은 확실히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돈이든 시간이든 지나침과 모자람이 없도록 밸런스를 잘 유지한다는 좋은 의미도 있겠지만, 항상 머리를 굴려 계산을 하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므로.

그런 말을 혹시라도 듣게 된다면 항의나 억울함을 호소할 것이다. 본인도 순수하고 무모하고 때로는 어리석기도 한 선택을 하여 속이 상할 때가 많은데, 어찌 몇 번의 모습으로 혹은 겉으로 보이는 면만 보고 그런 말로 판단할까 싶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보다 훨씬 더 계산적인 사람을 떠올리며 그런 사람에 비하면 자신은 엄청 순수한 사람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늘 더 나쁜 비교의 대상은 존재하니까.

상대적 비교와 선택에 일찍이도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은 나의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항상 비유를 들어 말씀을 해주셨다. 성경을 열심히 읽어서일까? 이전에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쳐본 경험에 의해서일까? ‘잘 드는 칼과 이가 빠져 잘 들지 않는 칼’ 중 어떤 칼로 살 것인가를 질문하신 어머니는, 그 하나의 비유로 내 삶의 방향과 목표를 정하게 해주셨다. 그 어머니께서 선택에 필요한 셈법 또한 가르쳐 주셨다.

딱 절반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빵이 있을 때, 큰 것을 선택한 사람은 양이 많고 더 좋은 것을 가져서 만족스러울 것이고, 작은 것을 먼저 선택한 사람은 내가 양보했으니 마음이 편해서 작은 양에 개의치 않고 더 기쁘고 맛나게 먹을 것이라 했다. “각자 자신의 셈법으로 계산하며 사는 것이 우리 삶인데 너는 어떤 것을 선택할래?” 하는 것이 그녀의 질문이었다.

대부분 출생의 순서로 선택이 이루어졌으니 그런 말씀과 교육을 받은 자녀들로서는 선뜻 크고 좋은 것에 손이 가지 않았다. 그 덕분에 나중에 남은 몫을 받게 되는 밑의 동생들도 불만이 없었고 순서를 바꾸자고 어머니의 방식에 항의할 일도 없었다.

어머니는 그 셈법의 반대급부를 강조하지는 않으셨다. 작은 것을 받은 자의 불평과 불만, 큰 것을 택한 자가 가질 미안함과 마음의 불편함, 힘없고 열등한 자가 하게 될 항의나 적대감 등에 대해서는 말씀을 삼가셨다. 평등이나 공평함 같은 그런 셈법보다는 그저 다 같이 행복해지는 셈법을 강조하셨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셈법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나 가족 안에서만 가능할 모양이다. 다른 사람도 내 마음이거니 하다가는 뒤통수나 맞기 십상이고, 억울한 몇 번의 학습이면 저절로 영악해져서, 좋은 것을 먼저 택하려고, 순서를 바꾸고, 순위도 조작하고, 앞선 자들의 발목을 잡는 일 또한 서슴지 않는 사회의 일원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는 계산법의 상대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었다. 때마침 읽고 있던 베이컨의 <학문의 진보>에서 유사한 대목을 발견했다. 그는 사회에 대해 개인이 갖는 의무와 판단도 상대적임을 이런 예문으로 설명했다. 시저의 암살을 계획하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같은 뜻을 가진 인사들을 초대해 권좌를 찬탈한 독재자를 죽이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동지로서의 적합성을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일부는 노예처럼 사는 것은 가장 큰 불행이라고 했고 일부는 내란을 겪느니 차라리 독재자가 낫겠다고 피력했다고 한다.

대의나 도덕이나 국가의 미래가 아니라 내 상황, 내 삶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이 셈법은 어찌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는지! 최선이란 것은 어차피 없으니 그저 덜 힘들고, 덜 어렵고, 덜 나쁜 선택지를 찾을 수밖에 없는 그 계산의 상대성을 그저 따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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