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지 전 경남대 교수 / 경남대 고운학연구소 연구원

오랜 기간 독신 연예인들의 삶을 보여주는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은 네 살이나 다섯 살 된 어린아이들의 사생활까지 TV로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어릴 때는 다 귀엽고 이쁜지라, 채널을 자주 바꾸는 남편도 그 아이들 앞에서는 무장해제가 되는 모양이다. 한동안 ‘푸바오’ 앓이를 했던 나도 똘똘한 아기들을 보면서 그 속상했던 마음을 달래게 되었다.

말씨나 행동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영리하고 당찬 이 아이들은 예의까지 발라 어른들께 배꼽 인사를 하느라 두 손을 배에 올리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예쁜 손’이다. 그 예쁜 손을 보니 내가 자주 말하던 ‘예쁜 눈’이 떠올랐다. 야단을 들어 속이 상하거나 억울할 때, 때로는 싸우느라 화난 눈으로 흘겨보거나 눈을 치켜뜨고 있을 때, 나의 아이들에게 하던 말이었다. 눈에서 힘을 빼고 예쁜 눈을 만들려 하다 보면 화도 풀리고 응어리도 풀려 화해도 쉬이 이루어졌다. 지금은 ‘예쁜 눈’을 외칠 대상이 나밖에 없게 되었지만.

내친김에 눈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면, 눈 자체는 세상을 알게 해주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감각 기관이다. 후각으로 향기를 느끼고, 촉각으로 부드러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방송이나 신문 혹은 인터넷을 통해 듣거나 보기 때문이다. 청각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란 말이 눈의 우세를 알려준다. 수백 번 들은 말이라도 한번 눈으로 보는 것만큼 생생하고 확실하게 실체를 알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뜻이니.

볼 수 없으면 색도 모르고 거대한 크기도 인지할 수 없으니, 바다와 하늘은 얼마나 설명하기 어려우며 봄날 눈인 듯 비인 듯 휘날리는 벚꽃에 대해 알려주는 것도 무척 난감한 일이 될 것이다. 수피 문학에서도 등장하듯 코끼리를 만져 본 시각장애인들이 각자가 만진 그 부분의 지식만을 통해 전체를 판단했다는 일화도 괜히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사물이나 사건 그리고 상황을 이해하려고 우리의 눈 즉 카메라를 대상에 들이댄다. 사실 카메라에 장착된 렌즈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찍어서 우리의 뇌로 보내는, 사심도 없고 왜곡도 하지 않는 매우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도구이다. 감정이 부착되지 않은 렌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 시각장애인이라도 되는 듯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이해하고 싶은 대로만 이해한다. 그러다 보니 코끼리는 기둥이 되기도 하고 혹은 큰 부채가 되기도 한다. 전체를 보기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해석도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하여, 같은 물잔의 물에 대해서도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좋아하기도 하고 물이 반만 남았다고 억울해하고 서운해하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는 렌즈 갈아 끼우기도 서슴지 않는다. 때로는 시어머니의 눈으로, 때로는 친정어머니의 눈으로 렌즈를 갈아 끼우고, 주인과 고용주, 갑과 을로 자리를 바꾸면서 때로는 가해자의 렌즈로 때로는 피해자의 렌즈로 바꾸어 낀다. 심지어 선글라스라도 되는 양 렌즈 색깔도 마음대로 바꾸어 넣으며, 다른 눈으로 보고 다르게 해석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누군가의 사진 작품 앞에 서면, 확실히는 몰라도, 따뜻한 시선이었는지 고발하는 시선이었는지 작가의 마음이 조금은 전해진다는 것이다. 어떤 마음으로 대상을 본 것인지 드러나기도 하고 알게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이제는 나의 눈을 내가 결정할 때가 되었다. ‘예쁜 눈’으로 세상을 보아 내가 만든 삶이란 작품에서 감사하는 마음이 느껴지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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