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열 광복회 대구시지부 사무국장/전 대구가톨릭대 부교수

정인열 광복회 대구시지부 사무국장/전 대구가톨릭대 부교수
정인열
광복회 대구시지부 사무국장
전 대구가톨릭대 부교수

2024년 2월 23일 저녁, 대구시 중구의 한 강의실. 광주에서 달려온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이 대구시민들에게 역사 특강을 하고 있었다. 경북 안동의 임청각 군자정 사진을 강의 자료에 띄우고 설명을 이어갔다. 노 원장은 임청각은 고성 이씨 종택으로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의 생가이고, 석주 집안은 모두 11명의 독립운동를 배출했다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다 임청각에는 ’제임청각(題臨淸閣)‘이라는 제목의 한시(漢詩)가 있다고 소개했다. 노 원장은 한시 내용도 설명했다. 최근 그 한시를 다시 찾아보니 이러했다.

훤칠한 누각 하늘을 찌를 듯 조망이 새로운데(快閣淩歊眺望新), 산을 가리는 가랑비 다시 객을 머물게 하네(藏山小雨更留人). 성대한 잔치 좋은 밤 환락이 흡족한데(華筵卜夜顧悰洽), 좋은 일에 인친은 기쁜 마음 가득하구나(勝事聯偏喜氣津). 구름과 물은 마을을 안아 생동하는 그림 펼치고(雲水抱村開活畵), 음악소리는 좌석을 울리며 손님을 끌어안네(絲簧咽座擁嘉賓). 시를 지을 것 없소, 이름 이미 알려졌으니(題詩不用知名姓), 지난 날 천태산의 하지장(계진)이라지(過去天台賀季眞). (임청각 이창수 종손 제공)

노 원장은 한시가 쓰여진 시기는 1591년 늦봄이고, 한시를 지은 사람은 고태헌(高苔軒)이라고 밝혔다. 이어 강의를 듣던 대구 사람들에게 물었다. ’고태헌이 누구인지 아시느냐?‘라고. 노 원장의 질문에 선뜻 대답을 한 사람은 없었다. 필자도 그가 누구인지, 임청각에 그런 시가 걸려 있는지조차 몰랐다. 노 원장 설명을 듣고, 임청각에 내걸린 한시의 작가가 전라도 유명 인사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가 임청각 주인과 사돈 관계임도 알았다. 고태헌은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유명한 고경명(高敬命)이었다.

노 원장의 설명처럼, 고경명은 시를 지은 이듬해 1592년 일어난 임란으로 두 아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고경명의 큰아들 고종후의 아내 고성 이씨는 16세의 시동생 고용후 등 식솔 50여 명을 이끌고 친정인 안동 임청각으로 피난해 지냈다. 피난살이를 했던 고용후는 이후 과거에 급제해 안동부사로 부임했다. 고용후는 피난 때 도움을 받았던 고성 이씨 문중과 학봉 김성일 일가 등에게 감사의 잔치를 베풀었다.

이런 배경의 임청각과 이상룡 집안의 사연을 최근 다시 떠올렸다. 2025년 광복 80주년을 맞아 서울시와 안동시가 1926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일가의 독립운동 여정과 일제에 의해 훼손된 임청각 복원 사업을 소개하는 특별 교류전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각종 광복 기념행사의 홍수 속에 지난 5일부터 시작돼 이달 말(31일)까지 열리는 이번 특별 교류전이 관심을 끄는 까닭은 그의 생애가 혼란스런 현재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고 돋보여서다.

전통 유림이었던 그는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의병운동에 투신했다. 그게 좌절되자 혁신 유림으로 변모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1910년 조선 정부가 없어지는 경술국치에 이르자 54세 노구에도 가산을 정리해 만주로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나섰다. 국권 상실에도 투쟁과 저항 대신 유학을 지키려 섬으로 떠났다는 유학자도 있었지만 그는 달랐다. 자신의 학문(유학)과 안일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했다. 국권 회복에 앞장서는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의무를 몸소 실천하고자 일어섰다. 오늘날 정치(사회) 지도자에게 절실히 요구되지만 사라지고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통합의 독립운동을 지향했던 그의 삶은 진영 논리가 난무하고, 통합과 화합보다 대결과 혐오를 부추키며, 국회에서 주식 투자나 하는 사이비 선량(選良) 같은 사욕에 매몰된 정치인이 활보하는 오늘의 정치권에 경계하는 바가 크기만 하다. 무더위로 짜증나는 요즘, 신정부 출범에 즈음해 그의 소환이 청량(淸凉)하고 반가운 이유이다. 상대의 몰락만 빌며 시간을 헛쓰는 이땅의 정치인이여, 국세나 낭비하는 의미 없는 여름철 휴가 대신 차라리 이번 교류전 관람에 나섬이 어떨지요?

정인열 광복회 대구시지부 사무국장/전 대구가톨릭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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