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 후, 빚 독촉에 20만 원 입금
채권 살아나 채무 변제 책임 유지
대법원 ‘시효부활 제한’ 전원 합의
로앤컨설팅 대표변호사
길 건너 시장에서 어물전을 하던 광수엄마는 먹고살기 힘들어서 20년쯤 전에 일수꾼에게서 돈을 좀 빌렸다. 처음에는 매주 차근차근 원리금을 잘 갚아나갔지만 어쩌다 보니 밀리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일수꾼과도 연락이 끊어졌다. 광수엄마는 고향을 떠나 먼 타지에서 새로 터전을 꾸렸는데, 일수꾼은 광수엄마를 찾아내지 못해서 빚독촉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십여 년이 흘렀다.
십여 년 후 일수꾼은 광수엄마에게 못 받은 돈, 이른바 악성 채권을 채권추심업체에 헐값에 팔았다. 추심업체는 정보력을 동원하여 백방으로 수소문하다 결국 광수엄마를 찾았다. 그리고 전화한다. “이보세요. 안 갚으신 돈이 이자까지 합쳐서 몇천만 원이에요. 집에 당장 빨간딱지 붙는 꼴 보고 싶어요? 조금이라도 먼저 갚아서 성의를 좀 보이시죠?” 법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서 겁이 난 광수엄마는 직원이 가르쳐준 계좌번호로 이십만 원을 입금한다. 오래된 빛 몇천만 원 중에 겨우 이십만 원만 받았을 뿐이지만, 입금을 확인한 순간 추심업체 직원 입에는 묘한 웃음기가 드리운다.
필자가 각색해서 써보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실제로 자주 있던 일이다. 추심업체 직원은 푼돈을 겨우 받아냈을 뿐인데도 왜 그렇게 뜻 모를 웃음을 지었던 것일까. 그것은 ‘소멸시효 완성 후 일부변제의 효과’라는 법논리 때문이었다. 채권에는 소멸시효라는 것이 존재한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이를 시효완성이라 한다) 채권이 소멸했다고 채무자가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기간을 채웠다고 해서 자동으로 채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채무자가 ‘사라졌어요’라고 주장을 해야만 갚을 책임을 벗을 수 있게 된다. 만약 채무자가 그런 주장을 포기한다고 채권자에게 선언하면 채권은 소멸하지 않고 채무자의 변제 책임은 계속 유지된다.
그런데 위의 광수엄마처럼 시효완성 후에 채무자가 (시효가 완성되었는지도 모르고) 일부를 변제하면 어떻게 될까,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대법원은 이런 경우 ‘채무자가 시효완성 주장을 포기한 것이다’라고 해석해 왔다. 따라서 아무것도 모르고 겁에 질려 소액을 일단 송금한 광수엄마는 이제 몇천만 원을 다 갚을 책임을 지게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시효완성이 되어 안 갚아도 될 뻔했는데 말이다.
몇 주 전에 대법원이 수십 년 만에 대법관 전원합의로 해석을 바꿨다. 시효완성 후에 일부변제 했더라도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 했는지 모르고 했는지 등을 잘 따져서 채권의 소멸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지, 덮어놓고 무조건 채권이 살아난다고 봐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능히 2025년 올해의 판결로 꼽힐만한 중대한 판결이었다. 이제 광수엄마는 살아날 빛이 보이게 되었다. 물론 남의 돈을 빌렸다면 갚아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긴 하다만 말이다.
